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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Sep 14. 2020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체코는 5세기 무렵 북쪽의 슬라브인이 정착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로마가 지배하다가 서기 800년 중세로 접어들자 모라비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모라비아 왕국이 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그리고 폴란드 동부를 차지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다.


이후 기마 민족인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모라비아 왕국이 멸망하고 독일의 지원을 받아 마자르족을 몰아낸 보헤미아 왕국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체코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1307년 보헤미아 왕국의 바츨라프 3세가 서거하면서 보헤미아 왕조는 단절되고  1346년 당시 독일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4세가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그는 허허벌판이었던 바츨라프 광장을 신시가지로 만들면서 거대한 말 시장을 조성했다. 이후 이곳은 <말 시장>이라고 불렀다.


광장 중앙에는 바츨라프 청동 기마상이 서 있다.



서기 907년 바츨라프가 태어났을 당시 보헤미아 왕국에는 기독교가 아직 널리 전파되지 않았을 때였다.


하지만 그는 할머니를 통해서 기독교식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보헤미아의 통치자가 된 후 그는 독일 교회의 도움으로 이 곳을 기독교화하였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그가 국난에 닥쳤을 때 동굴에서 잠자고 있던 보헤미아의 기사들을 깨워 적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이교도 신앙을 고집하던 그의 어머니와 동생은 반대파 귀족들과 손잡고 그를 죽이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동생은 마침내 자객을 보내어 바츨라프를 암살하고 말았다. 935년 9월 28일의 일이었다. 바츨라프는 죽는 순간에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주여 당신의 손에 나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이후 그는 기독교 국가가 된 체코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그의 시신은 성 비투스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2000년이 되자 체코는 그가 순교한 날을 국경일로 정했다.


바츨라프 기마상을 자세히 보면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을 중심으로 4명의 보헤미아 성자들이 보인다. 그중 제일 앞의 왼쪽에 보이는 사람이 바츨라프의 할머니인 성녀 루드밀라이다. 그리고 기마상 아래에 체코 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체코 땅의 영도자이며
우리의 주군인 성 바츨라프여!!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소서.


이 말에는 체코의 격동의 식민지 역사가 담겨있다.


15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을 계기로 이 곳을 지배하기 시작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18년까지 무려 400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기간만 길 뿐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일제 치하 같은 지배를 당하지는 않았다.


단지 1700년도 말부터 1800년도 초까지 마리아 테레지아가 잠깐 공공장소에서 체코 말을 쓰지 말고 독일말을 사용해라고 한 적은 있지만 우리처럼 지배를 받은 적은 없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와해되었고 그해 10월 28일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합쳐진 신생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족자결주의가 무색하게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있는 나라였으며 그중 독일인이 23퍼센트나 되었다.


그 후 독일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집권하게 되었고,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살고 있던 체코의 수데텐 지방을 귀속시키고 싶어 했다. 그렇게 전쟁분위기로 몰고 간 히틀러는 수데텐 지방을 빼앗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체코 전체를 점령하였다. 이후 바출라프 광장은 나치가 선동하는 군중 집회장이 되었다.


체코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7년간이나 나치의 지배를 받았으며 1945년 8월 15일 독일이 패전하면서 잠시 독립을 찾게 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독일을 기준으로 동쪽은 소련이, 서쪽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등이 관리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냉전시대가 시작되는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서로 반대되는 이념을 가진 양 진영은 체제 경쟁을 시작한다.


당시 체코에는 안토닌 노보트니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제1 서기장, 지금의 대통령으로 오르면서 본격적인 사회주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유가 제한되고 경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체코인들은 소련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때 알렉산드르 두브체크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당원에서 출발해 이후 서기장까지 올랐던 그는 당시 서기장이었던 노보트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언론 종교 출판 집회의 자유와 사유재산의 인정을 주장했다.


당신은 사회주의가 먼지 모른다.
내가 진짜 사회주의자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이다.


이에 두브체크는 임기가 끝난 노보트니를 대신에 제1 서기장으로 오르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미국과 체제경쟁을 하고 있던 소련에 의해서 탄압당한다.



1968년 8월 20일. 200대의 탱크와 20만 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소련 연합군이 프라하로 진격한다. 군인들은 바츨라프를 장악하고 전화선과 전기선 그리고 트램선을 잘랐다. 또한 공항까지 폐쇄하며 프라하를 고립시켰다. 그렇게 소련 군대와 대치하게 된 프라하 시민들은 남녀노소 모여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맨몸으로 탱크를 막았다.


처음에는 농담도 하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분위기가 나빠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비폭력으로 시작한 체코 국민들의 저항에 소련 정부의 발포 명령으로 바츨라프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졌고, 총포에 맞서 레스토랑에 있던 냄비 숟가락으로 맞섰던 프라하 시민들은 처참히 짓밟혔다. 당시 신문에 나온 자료로는 248명 사망, 400명 중상이었다.


두부 체크를 중심으로 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물결이었던 <프라하에 봄>이 꺾이는 순간이었다.



이후 소련의 감시가 더 강해졌고, 두브체크와 주변 사람들은 도망을 가거나, 이유 없는 옥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비밀경찰들이 술집과 카페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감시를 했다. 결국 체코 사람들은 기가 죽고 의지가 꺾이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에 항거하여 두 번째 <프라하의 봄>을 외치며 1969년 1월 16일 대학생이던 얀 팔라흐가 이 광장에서 분신자살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자살을 하는 이유는
소련이 미워서 프라하의 봄이 실패해서도 아니다.
단지 프라하의 봄이 실패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프라하 시민들에게 화가 나서이다.


이후 2월 25일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 얀 자이쯔가 같은 방식으로 자살했다.


그해 3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아이스하키 국가팀이 국제 아이스하키 대회에서 소련팀을 두 번 누르자, 15만 명의 관중이 이 광장에 모여서 환호하며 승리를 축하했다.


이때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경찰과 충돌했고 이 광장에 있던 소련 국영항공 프라하 지국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는 진압되었고 이후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다만 두브체크 자리에는 후사크라는 새로운 소련의 대리인이 서기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년 후 엉뚱한 곳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1980년도에 소련에서 오일 쇼크로 경제가 휘청거리고 체르노빌 원전에서 폭발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소련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에 기회를 잡은 동유럽 국가 들은 자유 혁명을 시도한다. 바웬사 혁명으로 폴란드가 제일 먼저 자유를 찾게 되고 이에 자극받은 체코 사람들은 바츨라프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손에는 꽃 한 송이를 쥐고 있었다.



1989년 11월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선두에 서고  프라하 봄의 기수였던 두브체크가 함께한 혁명은 12월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공산주의 시대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그해 12월 29일 체코 사람들 손으로 바츨라프 하벨을 새 대통령으로 뽑았고 하벨은 두브체크를 국무 위원장으로 지목했다.


젊은 하벨과 늙은 두브체크가 눈물을 흘리며 포옹했던 곳이 바츨라프 광장에 있는 2층 난간 건물이다.


이후 체코 사람들은 이 두 달간의 혁명을 <벨벳 혁명>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이 기간 동안 어느 누구 하나 다치거나 죽지 않았기 때문에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벨벳을 비유해서 부르게 되었다.



벨벳 혁명이 성공한 뒤 자유를 위해 죽음으로써 압제에 항거했던 얀 팔라흐가 죽어갔던 장소에 청동 십자가를 놓았다. 또한 바츨라프 광장 중앙에 그들을 기리는 무덤을 만들어 억압에 항거하며 자유를 지켜낸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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