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가 광장
9세기에 국가 형태로 성장하기 시작한 체코는 12세기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14세기 카를 4세 때 신성로마제국 수도가 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 유명한 프라하의 카를교 역시 카를 4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후 체코는 종교전쟁과 세계대전, 공산주의 혁명 등으로 부침을 거듭해 왔다. 그동안 프라하는 파괴와 복구를 반복했고 그 시간의 두께에 의해 오늘날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프라하의 중심에 있는 구시가 광장에 들어서면 18세기에 만든 바로크 양식의 성 니콜라스 성당과 로코코 양식의 골즈 킨스키 궁전 그리고 고딕 양식의 틴 성당이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모습으로 광장을 감싸고 있다.
그 중앙에 얀 후스 동상이 있다.
얀 후스(1369년~1415년)는 종교 개혁가로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는 복음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라틴어로 된 예배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체코어로 설교하였다. 특히 그는 당시 면죄부 판매로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종교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이 빨랐다.
1411년 면죄부를 비판한 얀 후스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한 후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 당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들이 지금 거위의 입을 틀어막지만 100년 후에
그의 화형 당한 몸에서 백조가 태어나게 되리라.
그때는 아무도 입을 막지 못하리라.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 란 뜻이며 100년 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백조가 루터파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얀 후스가 순교는 체코 전역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1419년 얀 후스의 추종자들은 시청으로 달려가 13명의 시의원을 시청사 창문으로 내던졌으며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을 파괴했다. 그러자 교황청은 군대를 파견해 폭동을 진압했다. 이후 후스파인 신교와 구교의 전쟁은 15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당시 틴 성당은 신교파들의 성전이 되었다.
그리고 신교파는 점점 불어나 체코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1526년 체코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왕가의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는 즉위하자 신교파인 체코 귀족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1618년 신교 측은 프라하 성으로 달려가 성직자 2명과 비서 1명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데 이것이 체코에서 일어난 두 번째 창문 투척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어 유럽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게 되는데 1620년 프라하 교외의 빌라 호라에서 신교 측은 대패한다.
승자가 된 합스부르크 왕가는 1621621이란 수열을 염두에 두고 체포된 체코 귀족 지도자 27명을 1621년 6월 21일에 바로 이 광장에서 참수형에 처한다. 그 날이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라 참수된 시신을 오랫동안 보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시청사 아래 바닥에는 27개의 작은 십자가와 <21 VI 1621>라고 적혀 있다. 이는 1621년 6월 21일이라는 의미로 숫자를 한데 묶으며 1621621이 된다. 이후 체코는 300년 동안 합스부르크가 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는데 종교와 정치 그리고 문화적으로 탄압당했으며 모국어 사용도 금지되었다.
얀 후스 서거 500주년이 되는 1915년에 얀 후스 동상이 들어섰다. 동상 중앙에 그가 있고 그 주위로 그를 추종하는 후스파들과 식민지 시대에 추방당한 신교도 그리고 체코 부활을 상징하는 어머니와 아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다음의 내용이 동상을 들러 싼 벽에 적혀 있다.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진리를 기원하라.
얀 후스의 동상을 뒤로하고 시청사로 가면 프라하 구시가 광장의 하이라이트가 나온다. 바로 구시청사탑에 있는 천문 시계탑이다.
1410년에 최초로 설치된 천문시계는 세계에서 3번째로 오래된 천문 시계이며 현재 작동하는 천문 시계로서는 가장 오래되었다. 시계 장치는 두 개의 부분으로 위의 칼렌타륨과 아래의 플라네타륨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쪽의 칼렌타륨 한가운데에 지구본이 보인다. 이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이 돈다는 천동설에 입각한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시곗바늘이 하루에 한 바퀴를 돌며 년, 월, 일, 시간을 나타내고 있다.
중앙의 지구본 위로 파란색은 아침부터 저녁시간을 나타내고 아래의 황토색과 검은색은 새벽과 밤을 보여준다.
가장 바깥 원에 새겨진 아라비아 숫자는 해가 진 시점을 24시로 설정하고, 바늘은 해가 지기까지 남은 시간을 가리킨다. 위 사진에서 태양이 달린 바늘은 21시에 있어 해가지기 3시간 전이라는 시간을 보여준다.
안쪽의 로마 숫자는 지금과 유사한 24시간의 시간 체계를 보여주며 태양이 달린 바늘이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다. 로마 숫자 안쪽에 표기된 아라비아 숫자는 해가 뜬 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알려 주는데 태양이 달린 바늘이 10을 가리키고 있어 해가 뜨고 10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려준다
요약하면 지금 이 시계는 해가 지기 3시간 전이며 해가 뜬 지 10시간이 지난 오후 4시라는 것을 알려준다.
시계의 중앙에 보인 작은 시계에 보이는 황도 12 문장은 양, 황소, 쌍둥이, 사자, 처녀 등 계절에 따른 별자리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으며 끝에 태양이 달린 바늘이 현재 태양이 가장 가깝게 위치한 별자리를 가리키며 해당 월과 계절을 알려준다.
검은색의 달이 달린 시곗바늘은 달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태양이 달린 바늘과 함께 지구를 기준으로 태양과 달의 위치를 보여준다. 개기일식에 오시면 두 개가 겹치게 된다. 또한 검은색 시곗바늘 끝에 달려 있는 달은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조금씩 돌아가며 오늘 밤에 뜨는 달의 모습을 표시한다. 아래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달의 표면이 왼쪽은 대부분 검은색인데 지금 오른쪽은 하얀색이다.
이 외에 자세히 보면 조그마한 별이 달린 바늘이 보이는데 이는 천체를 관찰할 때 사용하는 항성시를 나타낸다.
천문 시계 양쪽에는 네 명의 인형이 있다. 거울을 든 사람은 자만과 허영을 의미하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람은 오른손에 금 주머니를 들고 있어 탐욕을 상징한다.
왼손에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 해골은 죽음을, 비파를 들고 있는 사람은 쾌락을 상징한다. 매 시 정각이 되면 천문시계는 인형 모양의 조각상이 움직인다.
정각이 되면 해골이 오른손을 흔들면서 종을 치기 시작하는데 들고 있던 모래시계를 비스듬하게 기울인다. 그러면 그 옆에 있는 다른 조각상들은 머리를 흔든다. 그리고 시계탑 위에 있는 창문이 열리면서 12명의 사도가 행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배신을 상징하는 황금 수탉이 울면서 끝이 난다.
모래시계를 수평으로 눕힌 것은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 죽음을 의미하고 조각상들이 머리를 흔드는 것은 죽음이 싫다는 의미로 죽음이 가까이 왔으니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신을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아래쪽에 보이는 칼렌타륨은 당시 사람들이 계절별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달력이다. 한가운데에 있는 프라하 성을 상징하는 탑 세 개가 보이고 이를 둘러싼 작은 원의 그림들은 쌍둥이, 사수, 게 등 황도 12궁의 별자리를 나타내며 1년의 12개월을 나타낸다.
황도 12궁의 바깥 동심원에는 농민들의 생활상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월별로 해야 하는 일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양자리에 태양이 위치해 있을 때는 밭을 갈아야 한다
제일 밖에 있는 테두리에는 잘 안 보이지만 하늘색으로 아주 작은 글씨들이 적혀 있으며 글씨들 앞에는 St가 붙어있다. 바로 성인들과 순교자들을 나타내고 있으며 총 365명이다. 중간중간에 빨간색 글씨는 공휴일을 의미한다. 달력은 한 칸씩 움직이면서 작은 화살표가 오늘을 가리키고 있다. 화살표가 작은 이유는 성인들의 이름을 가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플라네타륨 주위에 있는 네 명의 인형은 왼쪽부터 책과 펜을 든 연대기 기록자와 대 천사 미카엘이며 반대편에는 망원경을 든 탐험가와 책을 펼쳐 든 천문학자로 당시 존경받는 위인들의 직업을 표시하고 있다.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이 천문시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1410년 시계공 카단 미쿨라쉬와 얀 온드레 유브가 가장 먼저 시계와 천문 판을 만들었다. 1490년경에는 달력이 추가되었으며, 시계 전면부가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1552년 시계장인 얀 타보르스키가 수리를 했으며 그가 하누슈를 시계 제작인으로 언급한 문서를 남김으로써 한동안 하누슈가 천문 시계탑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누슈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프라하 시계탑을 본 각국의 왕들은 시계가 너무 아름다워 자신의 나라에도 시계탑을 만들어 달라고 하누슈에게부탁하자, 프라하 시 의원들은 이렇게 훌륭한 걸작이 다른 곳에 만들어지는 것을 우려해 하누슈의 눈을 멀게 했다. 복수를 결심한 하누슈는 조수의 도움으로 시계탑에 올라가 어느 누구도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시계를 부수고 저주를 내렸다. 그 후 시계를 고치려고 시계탑에 오른 사람은 죽거나 미쳐 버리곤 했는데, 최근에 와서 저주가 풀려 시계탑이 정상 작동된다고 한다.
수세기 후 이 전설은 공산주의 치하에서 창의성을 잃어버린 체코 문화계에 대한 은유로 재사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