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25화
[대문 사진] 에트르타 아몽 언덕
가끔씩 꿈을 꿀 때가 있다. 꿈이 보기 좋게 빗나가도 꿈꾸는 것만으로 행복한 때가 있다. 설사 현실이 꿈을 배반한다 하더라도 꿈속을 유영할 때가 제일 행복한 순간이란 걸 나이 드니 저절로 깨닫기까지 한다.
어린 시절 집에 가는 길은 무척이나 멀고 지루했다. 흙먼지 폴폴 날리던 신작로가 그만큼 넓고 길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어린 시절 그토록 걸어가기 힘겨워하던 길을 다시 걸어가다 보면, 길은 너무나도 짧고 협소하다 못해 이 길이 과연 어린 내가 힘에 겨워 걸어가던 그 예전의 길이 맞는 지 의아해진다.
상상이 잘 버무려진 꿈은 나라는 존재를 대양을 나는 거대한 흰 새 알바트로스로 만들다가도 어느 순간 시퍼런 파도에 휩쓸려 녹아내리는 석회암 덩어리로 변화시킨다. 헛물켠 꿈이 늘어갈수록 오기도 발동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그처럼 대개가 한 없이 펼쳐진 창공을 거침없이 자유로이 나는 ‘독수리’가 되기를 꿈꾼 경험이 있을 것이다.
늦은 아침 서둘러 빵 한 조각에 커피 한 잔을 비우고 쏟아지는 비 때문에 오르기를 주저했던 아몽 언덕으로 향한다. 2000년 그때처럼 걸어서 올라가기보다 차를 끌고 힘겹게 비좁은 언덕길을 오르고자 맘먹은 터라 관광 비수기도 한몫을 한다. 성수기였다면 비좁은 언덕길에 들끓는 피서객들로 혼잡을 이뤘을 좁은 오르막길엔 온통 진입금지에다 주차금지 표지판이 너덜너덜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시청 사에서 언덕까지는 차로 10분이면 족하다. 걸어가면 1시간 남짓 걸린다. 물론 도보 언덕길을 찬찬히 걸어서 올라가면 올라가는 동안 내내 시원하게 탁 트인 전망을 한껏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이 배가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 목적 없는 배회에 가까운 산책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기에 굳이 차를 끌고 경사진 길을 올라간다.
겨울이어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 따뜻한 봄날처럼 언덕바지 등성이의 들풀마저 싱그럽게 다가온다. 왜 이들의 풀들은 겨울에도 초록빛을 띠며 마구 자랄까? 바라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아몽(Amont) 언덕에 올라서자 수호의 성모 마리아 성당과 두 명의 프랑스 비행기 조종사를 추모하눈 조형물과 기념관이 반갑게 나그네를 맞아준다.
두 명의 파일럿이 있었다. 한 사람은 막세이에서 태어나 원래 뱃사람이었던 프랑수아 콜리(François Coli)이고, 다른 한 사람은 파리에서 출생한 샤를 뉭쥬세흐(Charles Nungesser).
1881년 2월 5일 저 남불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막세이 항구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선장이 된 프랑수아 콜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혁혁한 공로를 세운 그는 전쟁이 끝난 이듬 해인 1919년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추서 받았다.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비행기가 처음으로 전선에 투입된 건 제1차 세계대전, 전쟁 중에 비행기는 혁신을 거듭했고, 비행기 조종간을 잡은 젊은 조종사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비행 신기록을 세우고자 젊음을 불태웠다.
1892년 3월 15일 파리에서 태어난 샤를 뉭쥬세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공중전에서 54번이나 승리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비행술을 스스로 개척한 그는 전쟁 후에 파리 인근 오흘리(Orly)에 연습용 비행기 활주로를 건설했다. 그가 건설한 비행 연습장은 오늘날 샤를 드골 공항(파리 북서쪽)과 더불어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오흘리 공항(파리 남동쪽)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고하자 1919년 5월 19일 대서양 횡단 도전이 감행되었다. 프랑스 태생의 미국인 사업가 레이몬드 오르태그(Raymond Orteig)는 중간 기착 없이 파리 뉴욕 간을 비행하는 조건으로 이를 성사시킨 조종사에게 미화 25,000달러의 포상금을 지불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동조하지 않자 그는 다시 1924년에 제안을 하여 그 이듬 해인 1925년에 프랑스 인 프랑수아 콜리가 처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프랑수아 콜리는 몇 번의 시험 비행 끝에 함께 조종간을 잡고 대서양을 횡단할 동반자 샤를 뉭쥬세흐를 만나 마침내 1927년 5월 8일 파리 뉴욕 간 대서양 횡단 첫 비행에 도전한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흰 새(L’Oiseau blanc)’라 명명되었고 이 명칭은 뉭쥬세흐가 1925년 함께 비행한 인디언 추장의 이름 화이트 버드(White bird)에서 따왔다.
이날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 탓에 뉴욕에서 파리로 비행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지만, 프랑스 인 두 조종사는 상징적인 의미를 이유로 굳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날아갈 것을 고집했다. 목적지는 뉴욕 허드슨만 항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자유의 여신상 앞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이 두 사람의 성공적인 비행을 축하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타고 있던 비행기 ‘화이트 버드’와 함께 대서양 상공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그들이 실종된 지 채 2주도 되지 않아 스웨덴 출신의 미국인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가 대신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다. ‘고독한 독수리’란 별명을 지닌 린드버그는 ‘생 루이의 정신(Spirit of Saint Louis)’이라는 비행기를 몰고 프랑스 두 조종사가 시도한 파리 뉴욕이 아니라 거꾸로 뉴욕 파리 간 횡단을 성공리에 마친 뒤 파리 르 부르제(Le Bourget) 공항에 안착한다.
아쉽게도 프랑수아 콜리와 샤를 뉭쥬세흐 이 두 사람이 탄 ‘화이트 버드’ 실종 사건은 항공사상 유래 없는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1927년 5월 8일 두 사람이 탄 비행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지점은 에트르타였다.
에트르타 시당국은 이 두 사람의 대서양 횡단 비행 시도를 기념하여 1927년 아몽 언덕에 그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였는데, 높이가 24미터에 달하는 화살촉 모양의 뾰족한 조형물은 그들이 몰고 대서양 횡단 도전에 나선 비행기 ‘흰 새’를 상징한다. 그러나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는 바람에 에트르타 시당국은 1963년 조형물을 다시 건립해야만 했다.
에트르타의 탁 트인 아몽 언덕에 세워진 기념비이자 조형물은 이처럼 두 프랑스 조종사의 대서양 횡단의 꿈과 염원을 아로새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