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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Mar 24. 2024

성 요셉 천주교회

몽생미셸 가는 길 155화

[대문 사진] 밤낮없이 영성의 빛을 토해내는 성 요셉 성당 채광탑


제2차 세계대전에 파괴된 성 요셉 성당을 재건할 목적으로 드골 정부 산하 재건 및 도시 계획부는 르 아브르의 도심 재건을 맡은 건축가인 오귀스트 페레에게 일임했다. 요약하면, 르 아브르 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성 요셉 천주교회는 오귀스트 페레가 사망하기 전인 1951년 10월 21일 공사가 시작되어 사후 1956년 10월 107미터에 달하는 채광탑이 완성되고 다음 해인 1957년에 6월에 완공을 보았다.


성당이 완성되기 전 건축가는 오직 성당 재건의 꿈만을 간직하고 있던 교구 사제인 마르셀 마리 신부에게 성 요셉 성당의 청사진을 펼쳐 보이면서 그와 함께 공사를 진두지휘하다 영적으로 감화되어 죽기 직전 영세를 받기까지 한다. 무신론자였던 건축가가 죽음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것이다. 온갖 비인간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휴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이고 문화주의자였던 프랑수아 미테랑이 죽기 전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에 비견될 만한 일이다.


오귀스트 페레는 폭격에 날아간 옛 성 요셉 성당을 어떤 방식으로 복원하려 했던 것일까? 당시 그가 교구 사제에게 펼쳐 보인 청사진 너머로 그가 상상했던 건축적 상징은 무엇이었을까? 건축가가 머리에 떠올린 상징체계는 ‘등대’ 또는 ‘망루’에 관한 것이었다.


항구 도시인 르 아브르에 가장 걸맞은 종교 건축물이야말로 ‘영적인 등대’일 필요가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그것도 그만의 고유한 건축공법인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공법이라 할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밤낮없이 영성의 불빛을 토해내는 영적인 등대야말로 이 도시에 가장 합당한 건축적 상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9천 개의 철근 빔과 2백5십만 개의 리벳으로 조립된 에펠탑은 20세기를 목전에 둔 시기에 ‘강철의 시대’가 도래함을 알린 선구적 첨단 타워였다. 토목공학자 귀스타프 에펠이 3년에 걸쳐 파리 샹 드 마르스 광장에 설치한 에펠탑은 불순물 탄소를 완벽하게 제거한 강철을 마침내 프랑스가 생산했다는 의미 외에도 함께 공정에 참여한 수많은 엔지니어들을 거느린 프랑스가 높이 30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타워를 갖게 되었다는 자부심이 함께 녹아들어 간 상징체계였던 것이다.


샤이오 궁전(Palais de Chaillot)에서 바라본 에펠탑.


에펠탑이 완공된 1889년으로부터 딱 10년이 지난 뒤에는 미국인 오티스(Otis)가 발명한 엘리베이터를 전기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에펠과 함께 에펠탑 안에 설치하기까지 했다. 1887년 착공하여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1889년에 완성한 에펠탑은 1년 후에 개최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한 기념 조형물이었다. 우리는 갓과 곰방대를 만국박람회에 선보일 때 이들은 강철을 생산하여 제작한 철근으로 조립한 에펠탑과 자동차와 엘리베이터를 ‘상품’으로 출품한 것이다. 참고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방문객들은 300미터 타워 꼭대기까지 철계단을 이용하여 오르내렸다.


예 하나를 더 들자면, 뉴욕 허드슨만 항구가 한눈에 보이는 섬에 세워지는 <자유의 상>이라 할 것이다. 흔히 <자유의 여신>이라 불리는 이 청동 조각상은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바르톨디(Auguste Bartholdi)의 작품이다.


뉴욕 리버티 섬에 서 있는 <자유의 상>.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바르톨디의 작품으로 오른손엔 횃불이 왼손에 미국독립선언서가 기초되어 있는 권리장전이 들려있다.

왜 자유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에펠탑과 함께 거론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쏟아진다. 청동으로 제작한 이 거대한 자유의 상은 폭풍우가 몰아치면 자력으로 서있기가 불가능하다. 만일 허리케인이라도 몰아닥치면 자유의 상은 그대로 꺾여 허드슨 만 앞바다에 수장될 수도 있다. 이를 방지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속출하는 가운데 마침내 이를 실현한 이가 에펠탑을 세운 엔지니어 귀스타프 에펠이었다.


에펠은 바르톨디가 제작한 자유의 상에 에펠탑을 집어넣었다. 에펠탑과 똑같은 모양으로? 이와는 달리 마름모꼴의 철근 구조물로 자유의 상을 지탱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창안해 낸 것이다. 이로써 자유의 상은 어떠한 비바람에도 견디는 대형 조각상이 되었다. 오늘까지도 뉴욕 리버티 섬에 우뚝 서있을 수 있는 힘은 두 위대한 천재의 합작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자스 지방에 위치한 콜마르에서 태어난 바르톨디는 엄격한 프로테스탄트였던 부모 슬하에 자란 탓에 자유롭고도 진취적이며 원대한 꿈을 키워갔다. 파리 과학기술공업대학(우리 식으로 보면 카이스트(KAIST)와 같은 곳이다)에서 수학한 조각가는 크기가 대단한 조각품만을 제작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그가 제작한 조각상들은 한결같이 거대하다.


그의 이러한 원대한 꿈이 녹아들어 간 작품이 바로 <자유의 상>이다. 그는 나폴레옹 3세 때 에펠이 완공한 수에즈 운하 들머리에 이 조각상이 세워지길 희망했다. 그러나 <자유의 상> 오른손에 들린 횃불로 말미암아 희망이 물거품이 된 순간, 그는 낙담에 빠진다. 당시 이를 구입하려 했던 술탄은 이집트 카이로까지 찾아간 조각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여자는 손에 횃불을 들어선 안 되고 물 항아리를 안고 있어야 하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조각가는 카이로 숙소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횃불을 들고 있는 이슬람 여인>을 갈기갈기 찢은 뒤 파리로 돌아와 더 큰 자유에의 의지와 열망을 불태운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한 부르주아가 바르톨디를 뉴욕으로 초청하는데, 시카고 박람회에 한 번 조각작품을 출품해 보란 권유였다. <자유의 상> 모델과 함께(모친의 모진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각가는 모델과 결혼한다) 뉴욕을 찾은 바르톨디는 시카고 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는데, 이때 아버지 손을 잡고 박람회를 찾은 어린 초등학생 하나가 조각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그날 저녁 수취인의 주소 없는 편지를 쓴다.


“조각가 선생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찾아간 박람회서 본 선생님의 작품이 너무도 훌륭하여 그 감동을 여기에 적습니다. 온 마음으로 선생님의 작품이 꼭 뉴욕 항구에 세워질 것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닌 돈이 이것 밖에는 없지만 여기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수취인을 몰라 당시 제일 알려진 신문사로 편지를 보낸 초등학생의 편지를 받아본 신문 발행인은 신문 전면 하단에 초등학생의 편지를 게재하고 초등학생이 보낸 돈 액수까지 적어 넣는 바람에 미국 전역에서 엄청난 기금이 신문사로 쇄도했다. 여기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 수재민의연금 등 이른바 무슨 무슨 성금 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는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이로써 <자유의 상>은 뉴욕 항구가 한눈에 보이는 리버티 섬에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초등학생의 이름은 퓰리처(Joseph Pulitzer)였다!



건축가 페레가 떠올린 건 철근 조각도 아니요, 청동 조각도 아닌 그만의 독특한 건축 재료였던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망루 같은 등대, 즉 채광탑이었다. 우리의 등대에 관한 서사를 꽤 두툼한 책으로 엮은 민속학자의 말을 빌지 않아도 등대에는 이중의 의미가 담겨있다. 먼바다에서 등댓불을 따라 무사귀환을 하라는 신호가 그 하나라면, 항구에 입항 시 등대가 있는 곳에 암초가 있으니 이를 조심해서 피해 가라는 표시가 또 다른 의미다. 이 둘 가운데 건축가가 떠올린 상징적 의미는 과연 어느 것에 해당할까?


‘영적인 등대’ 구실을 하는 성 요셉 천주교회의 채광탑은 실제로 먼바다 60킬로미터 지점에서부터 확인이 가능하며, 뉴욕과 르 아브르를 오가는 정기여객선에 탄 여행객들이 타워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내지르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다.


건축가는 아쉽게도 타워의 완성을 지켜보지 못했다. 하지만 건축가는 죽기 두 해 전인 1952년에 이미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아미앵(Amiens)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페레 타워(Tour de Perret)를 완성한 바 있었다. ‘프랑스 최초의 마천루’란 위상을 얻은 페레 타워는 처음엔 104미터 30층 높이였지만, 21세기 초에 110미터로 높아졌다.


프랑스 최초의 마천루로 등극한 아미앵의 페레 타워.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제일 높은 마천루였던 페레 타워의 용도는 단순한 첨탑 기능만이 아닌 뉴욕의 마천루와 같이 실제 타워 안에서 기거할 수 있는 아파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미앵의 페레 타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제 국가들에 속한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스탈린주의 건축’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지만 철근 콘크리트의 지능적인 사용을 통해 좀 더 신속하고 요긴하게 재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1944년 9월 5일에서 11일 사이에 발생한 대규모 폭격으로 르 아브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도시였다. 도시가 해방되었을 당시 사망자가 5천 명에 이르고 1만여 채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8만 이상의 주민들이 집을 잃은 상태였다. 폭격에 희생당한 ‘순교의 도시를 유럽에서 제일 아름다운 도시’로 재건할 목적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에게 재건 프로젝트를 맡긴 이유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1926년 파리에 프랑스의 수호 성녀인 잔다르크를 기리기 위한 기념성당을 지을 목적으로 제작해 둔 초안이 있었던 관계로 건축가 페레는 이 초안을 토대로 성 요셉 성당의 본당 제단 위에 거대한 채광탑을 올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채광탑이 제단 바로 위로 올라섰다.


이 같은 대공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페레는 레이몽 오디지에(Raymond Audigier)가 지닌 야심 찬 프로젝트를 기꺼이 수용했다. 무신론자인 페레는 교회가 전쟁 희생자들의 기념비가 되기를 원하였고, 레이몽 오디지에는 신앙심이 두터웠던 까닭에 평화의 귀환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의 촛불을 봉헌하고자 했다. 한 사람은 희생비를, 다른 한 사람은 촛불을 의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페레는 채광탑에서 대서양 횡단 선박에 승선한 승객들이 보게 될 ‘등대’까지 떠올렸다.


성당 건설 작업은 1951년 10월 21일 초석을 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건물이 완성되기 이전에 공사비가 고갈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던 페레는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건물의 이중 기능에 해당하는 세속적인 기능까지도 첨가해야만 했다. 건물 공사가 한창이던 1954년 돌연 건축가가 사망하는 바람에 레이몽 오디지에는 페레의 건축회사 소속 조르쥬 브로샤르(Georges Brochard)와 협력하여 페레를 계승했다. 오디지에와 브로샤르는 또 다른 건축가인 자크 푸아리에(Jacques Poirrier)의 도움을 받았다.


1956년 10월 107미터에 달하는 채광탑이 완성되고 다음 해 1957년 6월에는 성당이 완성되었다. 미사 집전이 재개된 건 1959년 3월 22일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건축가 기 베르도이아(Guy Verdoïa)가 디자인한 제단과 내부 설비는 1964년 성당 완공 이후에나 완성될 수 있었다.


건물이 완성되어 가는 시점에서 성당 외벽이나 내부에는 어떠한 장식도 이루어지지 않기를 희망한 본당 사제의 요구에 따라(종교적 엄격한 계율은 그 어떠한 장식도 용인하지 않았다) 교회 외벽이든 내벽이든 그 어느 곳에도 페인트칠을 한 흔적이 없을 뿐 아니라 콘크리트의 자연스럽지만 거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정상 당연한 우여곡절이 발생했다. 유일한 장식적 요소라 한다면 파괴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옛 성당의 잔해와 함께 발굴된 단 2점의 조각상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흐그리트 위레(Marguerite Huré)의 스테인드글라스라 할 것이다. 그 색유리창만이 성당의 유일한 장식적 요소였기 때문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장인 예술가의 작품은 “현대 종교 예술에 비구상적 상징주의를 도입”하려는 열망으로 나타난다. 이제까지는 색유리창에 성서 속 이야기들이나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에 관한 서사들이 주류를 이뤘으나 이제부터는 서사가 빠진 색유리창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흐그리트 위레가 활동하던 1, 2차 세계대전 당시엔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이러한 전통적인 서사를 걷어내고 전통적인 도상학마저 포기한 채 오직 색상에만 의존하는 ‘서정적 추상’에만 전념했다. 성 요셉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렇듯 창조적인 과정에서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성당 내부는 그리스 나무 십자가 형상의 정사각형 한가운데 제단이 놓이고 제단 천장 바로 위로 높이 107미터 달하는 채광탑이 올라섰다. 콘크리트 거푸집을 막 걷어낸 듯한 거칠고 우악스러운 원시적 질감과 성당 내부 벽면의 분홍색 음영이 스며든 자갈 콘크리트 질감 외에는 그 어떤 장식적 요소도 찾아볼 길이 없는 곳이 성 요셉 성당이다.


이게 바로 페레가 의도한 철근 콘크리트에 의한 건축 예술이다. 이 때문에 ‘스탈린주의 건축’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긴 했지만, 무신론자가 의도한 장식은 건축물 자체의 상징 외에는 그 어느 것도 허용치 않는 냉정함에 있었다. 여기에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게 바로 마흐그리트 위레가 제작한 색유리창이다.


1952년부터 1957년까지 거의 378 제곱평방미터에 달하는 벽면에 12,768개의 색유리로 구성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생 쥐스트 쉬흐 루아르(Saint Just sur Loire)에서 만든 소위 ‘골동품’ 유리로 제작되었다. 입으로 불면 불규칙하고 뉘앙스가 강한 이 유리판은 조립식 정사각형 스크린 안에 통합되고 외부에는 흰색유리가 덧 장착되어 있다.


목조 계단을 통해 채광탑 꼭대기로 오를 때 절감하는 색유리창의 수직적 상승은 공상 과학 영화를 볼 때나 느낄 법한 스릴과 서스펜스를 안겨준다.


마흐그리트 위레는 7가지 주요 색상(주황색,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 빨간색, 녹색 및 흰색)의 엄격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제작하였으며, 색상의 강도의 차이로 총 50가지 음영을 획득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점은 건물의 하부와 상부의 광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바닥은 어둡지만 채광탑 맨 꼭대기 유리지붕은 완전히 투과된 거대한 투명한 유리 지붕으로 덮여 있어 위에서 쏟아지는 빛이 건축가가 의도한 대로 건물의 수직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건축적이고 장식적인 편향은 ‘영적 고양감과 탁월한 미적 통일성’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상단의 흰색 조명은 “침묵처럼 들린다.”[1]


흰 조명의 의미는 '침묵'이라고 색유리창 제작자인 예술가는 호소한다.


색상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방향에 따라 고르지 않게 보존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분홍색, 금색 및 녹색 톤이 탄생을 상징하고 있고, 남쪽에서는 황금색과 주황색 톤이 ‘성령의 힘’과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서쪽에서는 분홍과 빨간색은 행동과 힘을 연상시키고, 마지막 북쪽으로는 푸른 색조, 즉 하늘과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콘크리트에 반사된 색채는 색유리창을 함께 완성한 마흐셀르 르캉(Marcelle Lecamp)에 따르면, ‘교향시’에 해당한다.[2]


다시 한번 지난번의 화제로 돌아가면, 제단이 원형의 신자석 한가운데 위치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자 정통 로마 가톨릭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상기시킴은 물론 무신론자의 지나친 설교단 재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건축가의 돌발성은 저 아득한 성 소피아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의 시작을 알리는 그 시대의 상징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다행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면서 교회의 세속적 기능까지 함께 거론됨으로써 이보다 앞선 원형 회중석 한가운데 자리 잡은 제단의 상징성은 더욱 증폭되기에 이르렀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경구로 이어졌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한가운데 계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교회 한가운데 임할 성당을 원하셨도다.






[1] 프랑스 르브르통(France Lebreton), <성 요셉(Saint Joseph), la vigie du Havre(아브르의 망루)>, 2019년 8월 18일 자 잡지 <십자가(La Croix)>에서 인용.


[2] 프랑수아즈 가스테(Françoise Gasté), <성 요셉 교회(Église Saint Joseph)>, 2016년 11월 3일 르 아브르 홈페이지에 게재된 기사를 참조.


[3] 프랑스 르브르통(France Lebreton), <성 요셉(Saint Joseph), la vigie du Havre(아브르의 망루)>, 2019년 8월 18일 자 잡지 <십자가(La Croix)>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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