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54화
성당 건축의 역사는 앙드레 보느리가 『로마네스크 예술』에서 설파했듯이, 저 아득한 고대 비잔틴 양식에 입각해 지은 바실리카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 탄생 이후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란 수도를 건설하고 수도 한가운데 성당을 짓는데 이게 바로 성 소피아 성당이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모친 헬레나 대비에게 더없이 효자였던 황제는 스스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만을 유일하게 인정하여 오늘날 로마 가톨릭의 근간을 세웠다. 이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몸이라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만이 목숨을 건지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더없이 훌륭한 인간임에 틀림없지만 신성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은 아니라고 주장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트린 아리우스파를 비롯하여 모든 다른 교파들은 이단이란 이름으로 척결되었다.
오늘날까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이슬람 사원은 원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최초의 종교 건축물인 ‘교회’였던 셈이다.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모두 지하 동굴로 숨어들었고 지하에 숨어 살던 그들은 석회암에 땅굴을 파고 교회를 세우는데 그게 바로 ‘지하교회’다. 더군다나 지하교회는 이탈리아의 카타콤베에서 보듯 박해를 피해 지하공동묘지에 숨어서 미사를 드리던 초기 기독교 인들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이 지하교회가 현대화된 것이 크립트(Crypte)라는 성당 지하에 마련된 제단과 회중석이 있는 성소라 할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지상에 당당하고도 장엄한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 것이 성 소피아 성당이었다. 이 가톨릭 교회가 ‘지혜의 성녀’ 이름을 딴 것도 흥미롭다. 압축하면, 성당 건축은 비잔틴 양식을 추구한 바실리카 성당 건축에 따른 원형 교회의 탄생이다. 그걸 예증해 주고 있는 성소가 튀르키예 수도 이스탄불에 있는 이슬람 사원으로 바뀐 성 소피아 성당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 나무 십자가 형태의 원형 교회는 정사각형 지면에 세워진 건축물로써 둥근 지붕(돔 또는 두오모)을 하고 있고 상, 하, 좌우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한 제단, 제단을 원형으로 둘러싼 신자석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대에 존 칼빈(프랑스 어로 장 칼뱅)이 그토록 꿈꾸던 원형 교회다.[1] 종교개혁과 함께 등장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들은 이 원형 교회에 목말라했다.
원형 교회는 원래 가톨릭 군대에 의한 살육이 두려워 도망치던 신교도들이 광야에서 예배드릴 때 목사의 설교단을 중심으로 빙 둘러 모여 있는 가운데 바깥 가장자리에 의자를 들고 엉거주춤 서 있던 장로들이 호시탐탐 개신교도들을 뒤쫒던 가톨릭 군대가 들이닥치면 이를 피해 도망치고자 광야에 임시로 설치한 예배 장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부연하면, 목사는 신자들의 한가운데 설치한 천막아래 설교를 하고 신자들은 설교단을 빙 둘러싸고 예배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런 교회가 스위스의 쥬네브(영어로 제네바)나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 아직도 남아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개신교도들이 꿈꾸던 원형 교회가 대한민국에서 활짝 개화하기에 이르렀는데(대표적인 교회가 여의도 순복음교회다), 아이러니 한 사실은 이 원형 교회의 모델(archétype)로 자리 잡은 교회가 바로 성 소피아 성당이란 점이다. 이와 같은 원형 교회들은 역설적이게도 소피아 성당의 교회 내부 평면 도면을 극대화하거나 이상화한 경우에 해당한다.
나는 이쯤에서 반론에 시달리지만,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창조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모두가 원조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는 가설이 타당하다고 믿는 이유다. 성당 건축의 모델조차 성 소피아 성당이란 원조 모델에서 그 기원을 찾기에 그리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비잔틴 양식은 점차 고대 로마 건축에 상당히 빚진 바실리카 양식으로 발전하고 중세에 이르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변모한다. 비로소 3개의 회랑 구조를 갖춘 기다란 십자가 형태의 교회 내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돌을 쌓아 올린 육중한 건물 몸체는 거의 요새에 가까웠고 빛이 투과되지 않는 실내는 어두컴컴하여 감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에 빛을 끌어들이고 벽을 얇게 쌓아 올려 수직적 상승을 꾀한 건축물이 프랑스에서 탄생하였는데, 이러한 종교 건축물이 바로 12, 13세기 프랑스에서 활짝 개화한 ‘고딕 건축’이다.
로마네스크의 단순하고도 아무런 꾸밈이 없는 불투명하기까지 한 창문을 대신하여 고딕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리에 화려한 색을 입히기까지 한 유리창들이 벽면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는데, 자연의 빛이 투과하며 만들어낸 형형색색의 빛의 프리즘은 색유리창에 그려 넣은 성서 속 이야기들과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이야기까지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감흥을 일으키는 매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서적 서사는 당시 문맹의 신자들에게 인간 삶의 비유와 교훈으로 비쳤고, 문맹이었던 중세 인들은 교회 조각 장식이나 색유리창에 그려진 성서속 이야기들을 통하여 믿음의 상징체계들을 올바르게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혜를 깨닫고 실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읽고 쓸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고등교육까지 받은 21세기 현 인류는 성당이나 불교 사찰이나 힌두 사원이나 이슬람 성전에 가면 일부 전문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만다. 그저 눈을 껌벅일 뿐 이렇다 할 반응이나 말조차 없다. 둥그렇게 치켜뜬 눈동자조차 장엄한 건축물에 대한 경의는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지 경이로운 건축술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그렇듯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어느 누구 하나 온전히 건물의 장식이나 기호나 상징 체계를 읽어낼 수가 없는 현대판 문맹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게 현실이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유엔 산하 세계 교육 과학 문화 기구인 줄여 이름 하여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의 실상이 그러하다..
이쯤에서 말머리를 돌리자. 이 글의 주제는 ‘무신론자가 세운 교회’이니 에두른 표현은 그만하고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할 듯싶다.
르 아브르 시의 전후 재건 사업을 도맡아 도심을 재건한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는 채석장에서 돌을 캐내어 그 돌로 건물을 짓던 석공(석수) 조합의 장이었던 페레 가문의 장손이다. 페레 가문은 할아버지 때부터 오랫동안 채석장에서 돌을 캐내고 그 돌로 건물을 짓던 요즘으로 치자면 건설 회사나 다름없는 사업체를 이끌어왔다. 이런 피를 물려받은 오귀스트 페레는 석회암, 돌에 관해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석공이자 건축가였다.
벨기에 익셀르(Ixelles)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건너온 페레는 보불전쟁 당시 꼬뮤나르드(Communarde)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건축의 공산주의자(Communiste)가 될 자질을 타고났다. 이런 유전적 기질은 파리 조형예술학교(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해서도 바뀌질 않고 기존의 모든 건축의 전통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런 점에서 페레는 동시대 건축가로 활동했던 르 꼬르뷔지에와 상당히 닮았다.
페레 가문이 사상적으로 유물사관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내 관심 대상 또한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페레의 건축을 지켜보자면, 그의 건축관이 ‘소비에트주의’와 자연 연결되고 있음은 부인할 길이 없다. 이런 점에서 르 꼬르뷔지에의 건축도 소비에트 연방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전후 복구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르 아브르 시에 대한 페레의 도시 재건 프로젝트의 기존 건축물들을 모두 부정한 돌발적이고도 충격적인 성과는 그의 사후에 소비에트 연방에 속한 동유럽에서 그대로 답습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콘크리트다! 조각 예술품까지도 콘크리트로 제작하는 집단창작의 현주소는 북한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오귀스트 페레는 건축에 철근 콘크리트를 처음으로 응용한 건축가다. 건물에서 장식을 제거한 그의 건축은 콘크리트 자체의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건축의 실험장이었다. 기존의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은 페레가 지은 건축물들을 보고 기겁을 하면서 반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 권력을 등에 업고 도시를 완전히 새롭게 뜯어고치려 했던 르 꼬르뷔지에처럼 기성 건축에 가한 폭력을 일삼는 페레를 야유하고 경멸하고 비난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성 요셉 성당과도 같은 종교 건축물까지 지을 수 있었던 것일까? 무신론자인 그가 어떤 이유에서 르 아브르 시의 상징적 건물(랜드마크)에 해당하는 천주교회를 지을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 드골의 절대 권력이 뒷받침되었고 도시의 80%가 잿더미로 변한 르 아브르 시의 절체절명의 도시 재건에의 의지와 꿈, 그리고 주민들의 열렬한 기대가 맞물려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흑사병(페스트)이 훑고 간 파리를 재정비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의 절대 권력을 등에 업고 파리 재정비에 나선 세느 도지사(우리 식으로 치자면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 해당하는) 오스만(Haussmann) 남작과도 같이 돌발적인 추진력을 갖춘 행정가뿐만 아니라 청결에 대한 강박관념을 지니고 탱크가 지나가도 남을 크기의 파리 하수도를 건설한 벨그랑(Belgrand)과도 같은 엔지니어와 파리 도심 전체를 채운 아르데코 건축물을 설계하고 완성한 빛나는 건축가들이 있었을 뿐만아니라 이에 열광하고 환호하던 ‘새로운 도시’를 목말라하는 파리 시민들이 있었기에 벨에포크의 파리 재정비 사업은 가능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
파리 재정비 사업처럼 100여 명에 달하는 건축가 그룹을 이끌고 르 아브르를 재건한 오귀스트 페레로 말미암아 바닷가에 면한 항구도시 르 아브르(Le Havre)는 전 세계인들이 제일 방문하고 싶어 하는 인공미가 흘러넘치는 파리(Paris)처럼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지은 18층 높이의 타워를 자랑하는 시청사나 공공 기관 또는 일반 주민들이 살 아파트가 아닌 종교 건축물인 성 요셉 천주교회를 르 아브르의 랜드마크로 세운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여기에는 20세기 초 4,806미터에 달하는 몽블랑 정상이 마주 보이는 프랑스 알프스 고원지역 아씨(Assy)의 한 작은 성당에서 촉발된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한 수사이자 신부가 주창한 ‘성(聖)스러운 예술’ 운동이 기폭제가 되었다.
해발 1천 미터에 이르는 알프스 고원에 자리 잡은 아씨는 향토 건축가인 모리스 노바리나(Maurice Novarina)의 도움으로 1937년부터 1946년까지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Église Notre-Dame-de-Toute-Grâce)을 지었다. 성당은 이후로 당대 예술가들의 교회 장식으로 그 명성이 자자할 만큼 20세기 ‘신성한 예술(Art sacré)’ 부흥의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이 되었다. 건축가가 구상한 교회장식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조르쥬 루오, 피에르 보나르, 페르낭 레제, 장 뤼르사와 그의 제자 폴 코상디에, 오데트 뒤카레, 제르맹 리치에, 장 바젠느, 앙리 마티스, 조르쥬 브라크, 자크 립시츠, 마르크 샤갈, 장 콩스탕 드메종, 라디슬라스 키호노, 클로드 메리, 카를로 세르지오 시뇨리, 테오도르 스트라빈스키 등 회화, 조각, 태피스리, 색유리창, 도자기, 모자이크, 가구 및 설치물 등 온갖 장르를 방불케 했다.
오귀스트 페레가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러한 건축예술 운동을 모를 리가 없었다. 100명의 건축가들과 함께 르 아브르 시를 재건한 페레는 폭격으로 날아간 도시의 상징적 건축물로 시청사가 아닌 오래전에 그러나 역시 폭격으로 잿더미로 변한 ‘바닷사람들의 안식처’이자 ‘선원들과 노동자들의 쉼터’였던 성 요셉 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의 지아비로서 선원들과 노동자들의 수호성인인 동시에 장인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무신론자인 페레가 맡은 성당 건축은 당연히 건축가만의 독특한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축 시공으로 이어졌다. 어떠한 장식도 찾아볼 수 없는 이 교회 건축물은 말 그대로 전체주의의 이상에 사로잡힌 한 코뮤니스트의 걸작이자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소비에트주의’에 입각한 엄정한 사회주의 건설을 대표할 만한 구조물에 가까웠다.
멀리서 보거나 가까이서 바라보거나 할 것 없이 107미터에 달하는 채광탑 꼭대기에 자리 잡은 십자가만 아니라면 이 건물이 교회인지, 소방서인지, 전망대인지, 경찰서인지 전혀 알아챌 수 없는 외관을 갖추고 있기에 정통 종교 건축물과는 완전히 상반된 콘크리트 덩어리로 이해될 만하다.
이 건축물이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와 같은 사정에서 기인한다. 거기에다가 페인트 칠조차 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콘크리트가 품어내는 수직의 거칠고 추악한 기둥이나 벽면은 파리의 곡선을 살린 아르테코 풍의 석회암 건물에 길들여진 르 아브르 주민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두통거리였을 것이다.
모더니즘을 표방한 예술품이라 할지라도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장엄한 시멘트 덩어리는 끊임없이 주민들의 시야를 자극했다. 더군다나 이런 건물이 시의 랜드마크라니 주민들은 당혹해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심지어는 이를 피해 지나갔으며, 현대식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 또한 하루 종일 교회로 난 창에 커튼을 치고 살았던 걸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정사각형의 지면에 길이가 서로 똑같은 그리스 나무 십자가 형태의 교회 내진을 갖춘 성 요셉 성당은 원형 교회의 저 아득한 추억마저 불러일으킨다.
튀르키예에 건축물을 남길 만큼 이미 성 소피아 성당을 보았음직한 건축가 페레는 르 아브르 시의 기념비적인 종교 건축물에 해당하는 성 요셉 천주교회를 짓는 동안 내내 성당 건축의 기원으로 자리 잡은 성 소피아 성당을 떠올렸을 것이다. 종교개혁 시기의 칼뱅이 꿈꿨던 원형 교회는 물론, 현대 건축의 메카로 자리 잡은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도 떠올렸을 것이다. 성당은 완공된 지 6년도 채 되지 않아 르 아브르 시 역사건축물에 등재되었고, 2005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그가 재건한 르 아브르는 노르망디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도시가 되었으며, 루앙과 함께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도시가 되었다.
이쯤에서, 성당을 짓고 꾸미는 일에 대해 1930년대 ‘신성한 예술’이란 슬로건 하에 신성 예술가들 조합(Ateliers d’art sacré)을 결성한 도미니크 회 소속 쿠튀리에(Couturier) 신부가 던진 폭탄과도 같은 선언을 인용해야 할 것 같다.
재능이 없는 신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 믿음이 없는 천재들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낫다.
신부의 믿음이었다!
[1] 파리 북서쪽 방향으로 97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느와용(Noyon)이란 곳에는 종교개혁가인 장 깔뱅(영어로 존 칼빈)의 생가가 있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바뀐 이곳 전시실에는 깔뱅이 그토록 희망했던 원형 교회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