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래된 타자기 Mar 28. 2024

도시의 화산

몽생미셸 가는 길 157화

[대문 사진] 오스카 니에메예르가 지은 문화예술 공간 ‘화산(Le Volcan)’


창문 너머로 겨울비가 흩뿌린다. 갈 길을 잃은 나그네에겐 추적추적 내리는 차가운 겨울비처럼 치명적인 것이 없다. 겨울철인 데다 주말이다 보니 아침 일찍 전망 좋은 바닷가 카페들도 다 문을 닫았을 테고 그렇다고 콘크리트뿐인 도시를 허우적대며 걸어 다닐 용기도 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따사롭고 밝은 조명 아래 실내를 거닐며 벽에 걸려있는 작품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더없이 쏠쏠하다. 그림을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근처에 미술관이 있고, 책을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인근에 도서관이 있다는 건 꽤 근사한 풍경이다.


하지만 그 마저도 멀리에 있다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산책자가 되어야 한다. 메르뀌르(Mercure) 호텔 근처에는 화산(火山)이 있다.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 니에메예르(Oscar Niemeyer)의 작품이다. 호텔 맞은편 바쌩 드 꼬메르스 너머 건너편에 흰색 콘크리트로 지은 화산이 우뚝 솟아있고 문화예술 공연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기이한 형상의 조형물이자 건축물을 보기 위해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다.


브라질 건축가 니에메예르가 지은 르 아브르 시의 문화예술 공간 화산(Le Volcan), 아멜리 블로디오-엘로라후(Amélie Blondiaux-Hellolaroux) 사진.


건축가는 공산주의자다. 그는 브라질의 독재정치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해 온 난민이기도 하다. 그를 따뜻하게 맞아 준 프랑스, 그리고 르 아브르 시 도심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감베타 광장에 차후 세계 문화유산이 될 조형물이자 건축물을 짓게 해 준 시장 앙드레 뒤로메아 역시 공산주의자다.


배관 수리공으로 인생을 시작한 앙드레 뒤로메아(André Duroméa)는 인민전선 당시 19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공산당에 가입한 인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그는 투철한 애국심에 불타 독일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한 뒤, 독일의 노이엥가메 포로수용소에서 해방을 기다리던 중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프랑스 남서부를 담당하던  FIP 지휘관(중령)이었다. 해방된 조국 프랑스는 살아남은 레지스탕스 단원이자 지휘관이었던 그에게 레종 도뇌르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우리의 무공훈장에 버금하는 프랑스 최고 무훈 훈장이다.


그는 르 아브르의 시의원에 당선되고 프랑스 공산당 상임위원으로 야당에서 활동하다 1971년 마침내 르 아브르 시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오귀스트 페레가 시작한 르 아브르 재건 사업의 연계선상에서 감베타 광장에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을 조성하는데, 여기에 분화구 같은 형상의 독특하고도 모던한 현대 건축물 ‘화산’을 완성했다. 그가 바로 브라질 태생의 건축가 오스카 니에메예르다.


<화산>의 분수. 올라프 마이스터(Olaf Meister) 사진. 손 조형물 옆에 “어느 날 물처럼 대지와 백사장과 산들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것이다.”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1982년에 개장한 이 문화예술 공간은 오늘날 연극, 음악, 무용, 서커스의 장으로 거듭났다. 광장 이름도 오스카 니에메예르 광장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세워진 참으로 모던한 현대 건축물 <화산>은 새로운 미학, 새로운 이미지 및 디지털 아트 분야에 이르기까지 예술작품 제작 및 국가가 지원하는 공연문화의 실질적 보급에 해당하는 문화센터 복합공간으로 거듭났다.


2015년 문화센터 <르 볼캉(화산)>의 리노베이션 기간 동안 바로 옆에 또 하나의 건축물이 들어섰는데 이게 바로 공공 시립 도서관이다. 이로써 르 볼캉은 문학을 포함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완벽히 자리매김되었다.


밤에 본 르 볼캉의 위용 및 시립도서관 내부의 모습.


건축 앙상블은 주변 환경과 대조를 이룬다. 화산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가 재건한 도심, 특히 바쌩 드 꼬메르스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건축물로 두드러져 보인다. 약간 아래로 내려앉은 건축물은 지상에서 바라볼 때, 모두 용암이 솟아올라 형성된 분화구처럼 보인다. 건물 외관은 흰색이지만 주변 건물들은 모두 회색이다. 건축물 모두 곡선으로 설계되었지만, 르 아브르 도심은 직선으로 구성된 직각 도시이다. 진입로도 곡선이다. 이 모든 것이 움직임의 감각을 제공한다.


분화구에는 창문이 없고 직각이 없으며, 창문이 줄지어 있는 건물과 참으로 대조적이다. 주변 주택보다 높으며, 공간은 전적으로 보행자를 위한 것이다. 커다란 분화구(Grand Volcan)는 페레의 고전 건축과 달리 비대칭이므로 볼륨과 공간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페레가 구조적 고전주의 스타일로 건축했다면 브라질 태생의 건축가 니에메예르는 국제 스타일뿐만 아니라 콘크리트의 생경하고도 거친 건축 재료를 사용한 건축의 브뤼탈리즘(Brutalisme)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콘크리트로를 통하여 현대 건축을 완성하고자 했다는 의도와 그 열의 만큼은 누가 봐도 공통분모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한겨울 농민들의 분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