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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Apr 01. 2024

생타드레스 언덕길

몽생미셸 가는 길 159화


아침 일찍 일어나 간 밤 그토록 고대하던 르 아브르 현대 미술관 앙드레 말로 뮤지엄(MuMa)을 찾는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대거 몰려들어 예술가들의 성지가 된 그 화려한 영광을 되새겨주는 곳이 바로 앙드레 말로 현대 미술관인 까닭이다.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는 공쿠르 상(Prix Goncourt)을 받은 소설 『인간 조건(La Condition humaine)』과  『왕도의 길(la Voie royale)』을 쓴 소설가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가다. 현대 미술관은 그가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 시 문을 열었다. 1961년 6월 24일 자신의 이름을 딴 현대 미술관 개관식에서 앙드레 말로는 테이프를 끊으며 다음 같은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르 아브르 시민 여러분!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미술관은 상당한 인상파 작품들을 소장함으로써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버금가는 인상주의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르 아브르 앙드레 말로 현대 미술관, 벤 콜리에(Ben Collier) 사진.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의 도심 재생 프로젝트의 연계 선상에서 도심 한가운데에 들어선 르 아브르 문화예술의 전당은 대담한 건축물을 의도한 기 라그노(Guy Lagneau)와 오귀스트 페레를 계승한 레이몽 오디지에(Raymond Audigier)의 빛나는 걸작품으로 외부와 완전한 소통을 표방한 개방성으로 인해 다른 박물관과 차별화된다. 1961년에 문을 열었을 때 몇 년 동안 초기의 문화의 전당(Maison de la Culture)이 자리하고 있었을 정도다.


미술관 초기 컬렉션은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다양한 유럽 회화 유파를 아우르고 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이 미술관이 인상파의 시작을 예고한 으젠 부댕(Eugène Boudin)의 동생인 루이 부댕이 자신의 형 작품 240점을 기증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어느 곳에서 보다 으젠 부댕의 예술 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훌륭한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으젠 부댕이 인상파 화가들, 특히 클로드 모네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이밖에도 거상이자 열렬한 수집가였던 샤를 오귀스트 마랑드(Charles Auguste Marande)가 기증한 클로드 모네, 고갱, 피사로, 종킨드, 마르께, 카무앵, 반 동겐 작품을 비롯하여 1963년에 이루어진 뒤피(Dufy)의 유증도 한몫했다. 또한 그의 친구인 올리비에(Olivier Senn)의 컬렉션에서 205점(들라크루아, 코로, 쿠르베, 시슬레, 피사로, 모네, 기요맹, 드가, 크로스, 세뤼지에, 보나르, 발롱통, 드랭, 마티스, 마르께 등)이 추가됨으로써 인상주의만이 아니라 야수파의 미술관이란 타이틀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2002년 엘렌 센 훌드(Hélène Senn-Foulds) 여사는 할아버지 올리비에 센이 사망함에 따라 할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 67점을 기증했다. 2009년 7월 8일 엘렌 센 훌드 여사는 아버지인 에두아르 센의 컬렉션을 현대 미술관에 또다시 기증함으로써 미술관을 한층 빛나게 만들었다. 이로써 42점의 회화, 15점의 드로잉, 5점의 판화 및 5개의 조각품을 포함한 67개의 새로운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이 밖에도 2015년에는 센(Senn) 가문의 또 다른 기증자가 나타나 17개의 새로운 작품이 컬렉션에 합류하게 되었다.


2017년에는 1903년 오톤 프리즈(Othon Friesz)가 그린 <아브르의 옛 항구 저물 무렵(Vieux bassin du Havre, le soir)>이란 작품과 2019년에는 1906년 야수파(Fauvisme) 시대의 마르께(Marquet)가 그린 <르 아브르 항구(Le Havre, le basin)>가 미술관 벽면을 채우는데 기여했다.


오톤 프리즈(Othon Friesz), <르 아브르의 옛 항구 저물 무렵(Le Vieux Bassin du Havre, le soir)>, 1903, 르 아브르 현대 미술관.


2019년에는 플로렌스 말로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가 1956년 바랑쥬빌(Varengeville)에서 그린 그림 <Barques sur la grève>를 기증했다.


조르쥬 브라크(Georges Braque), 바랑쥬빌 해안에서 그린 <파선(Barque sur la grève)>, 1956, 르 아브르 앙드레 말로 현대 미술관(MuMa).


조르쥬 브라크가 1929년부터 여름을 보냈던 바랑쥬빌에서 그린 이 유화작품은 미국 건축가 폴 넬슨(Paul Nelson)이 지은 하우스 스튜디오에서 완성되었다. 노르망디 해안으로의 이주는 풍경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동반했지만, 특히 브라크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이곳을 중점적으로 그림으로 남겼다. 바다, 버려진 보트에 인간의 존재가 구현된 황량한 해변, 절벽, 꼬 지방(Pays de Caux)의 고원의 들판은 비좁은 수평 형식으로 표현되어 남다른 풍경을 이룬다. 붓 대신 칼로 작업한 흔적이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브라크는 표면의 재료를 주장하기까지 한다. 화가는 물질을 그리고자 원할 뿐만 아니라 꼬(Pays de Caux) 지방만의 풍경의 구조적 독특함에 이끌려 풍경을 나름대로 유형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다와 하늘은 그 자체로 서로 단단하게 결합되면서 어두워지고 지상만이 밝게 빛난다.


르 아브르 현대미술관, 줄여서 무마(MuMa)는 이처럼 노르망디 최상, 최고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현대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입구의 조각작품 「눈(Eye)」에서 미리 짐작할 수 있듯 미술관에는 현대 추상 미술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현대 미술관(MuMa) 입구에 설치된 조각 <눈(Eye)>
르 아브르 앙드레 말로 현대 미술관(Musée d’Art Moderne André Malraux) 내부 모습.


대표적인 작가로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작품이 걸려있는데, 이 화가이자 조각가, 현대 추상화가는 르 아브르 태생의 가장 문제적인 작품을 발표한 예술가로 유명하다.


장 뒤뷔페는 화가 베르나르 뒤뷔페(Bernard Dubuffet)와 이름이 비슷한 탓에 혼동되기도 한다. 20세기 이름하여 ‘원시 예술(Art Brut)’을 주창한 이 예술가는 르 아브르 태생이며 르 아브르 고등학교(Lycée du Havre)에서 수학했다. 이때 훗날 자신의 문학작품에서 프랑스 어휘를 자유자재로 만들고 사용하여 ‘언어의 달인’이란 소리를 듣는 레이몽 끄노(Raymon Queneau)도 함께 수학했는데, 두 사람은 서로 같은 학교 출신으로 한 사람은 공부에는 뜻이 없고 그림에 취미가 있어 르 아브르 조형미술대학을 거쳐 파리 국립 미술대학에서 예술가의 길로 나아갔고 다른 한 사람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전공한 뒤 작가의 길로 나섰다. 부연하면 그 두 사람이 수학한 르 아브르 고등학교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철학 교사로 재직하면서 실존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구토(La Nausée)>를 펴낸 곳이기도 하다.


장 뒤뷔페가 르 아브르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의 중등과정 2년차에 편입했을 때 이 학교에는 조르쥬 브라크(Georges Braque), 라울 뒤피(Raoul Dufy), 오톤 프리즈(Othon Friesz)도 수학하고 있었다.


장 뒤뷔페는 예술가의 삶에 첫발을 내딛을 때부터 반문화적 입장을 취하여 공식 제작과 학문적 규범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추구했다. 1945년 소외된 사람들과 정신질환 환자들의 작품을 발견하고 아이들의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그에겐 예술가로서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예술가의 창작에의 충동과 상상력에서 비롯된 순수하고 원초적인 예술적 창조물이라는 아이디어는 뒤뷔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프랑스의 병원과 교도소를 여행한 화가는 정신병원의 수감자, 원본 및 거주자가 만든 실제 작품과 물건 컬렉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파올로 몬티(Paolo Monti)가 찍은 1960년대의 장 뒤뷔페(Jean Dubuffet).


뒤뷔페는 자신의 예술을 뒷받침할 연구를 이론화하는 동안 모든 문화적 규범을 벗어난 자발적인 생산을 통한 예술운동인 아르 브뤼(Art Brut)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아르 브뤼란 ‘거칠고도 생생한 재료의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원시 예술’이란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농후한데, 1948년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장 폴란(Jean Paulhan)과 함께 아르 브뤼 동업자(Compagnie de l'Art Brut) 조직을 결성하기도 한다.


독학으로 공부한 뒤뷔페는 예술적 문화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합의된 미적 규범을 벗어나 작업하는 사람들이 만든 독특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작품을 위한 길을 닦고자 열망했다.


네덜란드 에마일 공원에 세워진 장 뒤뷔페의 작품.


1962년 당시 61세였던 뒤뷔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길고 독창적인 작품인 <L'Hourloupe>를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 사랑하는 사람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을 때, 화가는 공책에 빨간색과 파란색 볼펜으로 도형을 낙서했다.


르 아브르 앙드레 말로 현대 미술관에 소장된 장 뒤뷔페의 <L'Hourloupe>.


상상의 전문용어로 씌어진 텍스트와 함께 그림은 ‘늑대’와 ‘d'entourloupe’라는 단어가 혼합된 <L’Hourloupe>라는 새로운 조어에 의한 그림이 탄생한다. 이것이 장 뒤뷔페를 매료시켰고, 그는 이러한 형태를 캔버스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작가는 1966년에 만든 유명한 자화상과 같은 그림과 드로잉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 종이에 그려진 이 마커 드로잉의 명백한 단순함을 통해 뒤뷔페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지배적인 빨간색과 파란색 해칭을 채택한다.


1966년부터 부조와 그림을 결합하여 더 많은 생명을 불어넣기를 원했던 화가는 L'Hourloupe의 스타일을 조각과 건축으로 확장했다. 그는 「겨울 정원(The Winter Garden)」(1969-1970) 또는 「La Closerie Falbala」(1971-1973)와 같은 기념비적인 조각품을 만들기 전에 걸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 1973년 초, 뒤뷔페는 자신의 작품을 발레 방식으로 애니메이션화 하기로 결정하고 탁월한 연극 쇼로 구상된 감동적인 작품인 「Coucou Bazar」를 제작하기도 한다.


장 뒤뷔페의 「환영 퍼레이드」.


미술관은 성당이나 도서관처럼 몇 날 며칠이고 반복하여 관람할 필요가 있는 공간이자 대상이다. 미술관 벽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굳이 애처로워할 필요도 없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옮겨진 그 특별함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미술관은 예술가의 영혼의 무덤 같은 곳이라 예술가의 삶과 예술을 되질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본 작품들을 굳이 열거하지 않는다. 장 뒤뷔페와 베르나르 뒤뷔페를 굳이 연결 지을 맘도 없다. 다만, 화가인 장 뒤뷔페나 소설가인 레이몽 끄노나 둘 모두가 기존의 작가적 태도에 저항했다는 공통점만을 발견한다. 이 두 사람은 항구 도시에서 자라고 공부하고 어깨를 맞대고 함께 학교를 다녔으며, 후에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섰지만 자신들이 속한 방면에서 일인자가 되었다. 레이몽 끄노의 화려한 이력은 이제 소르본느 대학의 도서관 수장고에 쌓여 있는 논문들을 통해서 확인될 만큼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대 작가를 대표한다.


드가의 「치통으로 괴로워하는 세탁부」.


발레리나를 즐겨 그렸던 에드가 드가가 1870년 보불전쟁 당시 그렸다는 「치통으로 괴로워하는 세탁부」를 보고 있노라면 미술관은 확실히 ‘예술가의 영혼이 깃든 무덤’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머리에 두건을 두른 세탁부 중 한 명이 치통 때문에 손으로 턱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발레리나 동작 하나하나를 연구한 끝에 그림을 완성했다는 장인다운 드가의 모습까지 점쳐진다.


이 그림은 1870년 보불전쟁 당시 전선에 뛰어든 드가가 즉석에서 그린 그림으로 전우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3년 국가에 기증되어 1961년 르아브르 앙드레 말로 현대 미술관에 기탁된 이 그림은 그러나 1973년에 도난당했다가 2010년 뉴욕의 소더비 경매장에서 거래되다 발견되어 프랑스 정부의 반환요청으로 2011년 마침내 르 아브르 현대 미술관에 되돌아올 수 있었던 일화를 지니고 있다.

 

발길을 돌려 생타드레스(Sainte Adresse)로 걸음을 재촉한다. 모든 게 덧없다면 저 바라 보이는 풍경도 덧없어야 할 터인데, 자꾸만 한 장의 그림엽서가 발걸음을 헛디디게 만든다.


아직도 선물 가판대에서 팔고 있는 그림엽서. 엽서 속에 멀리 보이는 마을이 모네가 그토록 많은 작품을 남긴 그림 속 배경이 된 생타드레스다.


생타드레스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에서 새로워진다. 마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의 망명정부 수도였다. 브뤼셀에서 도망친 국왕의 임시정부가 있던 마을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 겨울철 아쉽게도 에트르타를 향한 여정은 고달프고 벅차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 아브르와 생타드레스의 경계에서 언덕길로 진입하기 전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본다. 겨울 바다는 화가의 그림처럼 밝지 않다. 이 험난하면서도 아름다운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에트르타엔 비 대신 눈이 내렸다는 기사(記事)가 맘을 들뜨게 만든다. 올해는 눈을 많이도 대할 참인가 보다. 과연 눈(雪)은 어느 여행가의 말처럼 봄으로 가는 시(詩)일까?


오톤 프리즈(Othon Friesz)가 1914년도에 그린 생타드레스(Sainte Adresse) 마을.


도착하기도 전에 눈이 먼저 내렸다. 지역 인터넷 언론 매체가 전해준 눈 내린 에트르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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