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래된 타자기 May 25. 2024

해 지는 바다에서

몽생미셸 가는 길 160화

[대문 사진] Thomas Le Floch 사진


한 장의 사진에 관한 명상


사진첩을 뒤적이다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한다.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볼 엄두가 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빛바랜 사진들은 지나온 삶의 궤적을 어둡게 비추는 환등기 같아 몇 번인가 사진들이 켜켜이 들어찬 사진 박스를 들춰보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뚜껑을 덮어버리고 만다.


사진들은 지난한 삶만을 들춰줄 것이 틀림없다. 옛 추억이 묻어있는 얼룩더미에 갇혀 눈시울을 붉히다가도 입가에 미소마저 띠기 쉽상이다. 사진들 가운데에는 결혼식 사진도 있을 것이고, 스페인 시에라 네바다와 그라나다를 여행할 때의 기억을 되살려 줄 추운 겨울날 시린 바람마저 묻어날 것이며, 루체른 호반에서 지인들과 뜨거운 와인을 홀짝이던 때의 가난하고 처량하기만 했던 정처 없는 여행에의 서글픔마저 몰려들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동유럽을 떠돌던 겨울과 여름날의 어설픈 추억까지도.


한때 나는 모든 과거를 지우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과거를 지워가기 시작했다. 사진 한 장이 주는 의미는 덮고 싶은 내 과거에 대한 일종의 저항과도 같았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졸업식 사진, 독일 호반의 레스토랑에서 친구가 찍어준 독사진, 책꽂이 한쪽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들춰보지 않는 사진들처럼 내 청춘은 행복하게도 종막을 고했다.


나는 내가 거닐던 아버지 집 정원을 기억하고 있다. 등나무가 어우러진 대문에서 집까지의 그 긴 진입로는 학교 가지 않은 날에 내가 유일하게 산책을 즐기던 곳이었다. 나는 그 길 위에서 삶의 부활을, 그리고는 언젠가 새처럼 자유로이 날아오를 삶을 꿈꿨다. 집에서 대문까지의 정원 길은 어린 나에게 참으로 길고 긴 인생의 여정과도 같았지만, 커가면서 그 길이가 짧아지면서 크기마저 줄어들었다.


봄날 목련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그 길 한가운데에서 나는 목놓아 울었다. 눈물을 훔치던 화창한 봄날에 나는 내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났다. 속내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작심했지만, 몇 번 그 길 언저리를 맴돌다가는 점점 더 멀리를 떠돌았다. 돌이켜보면 볼수록 아버지의 그 작은 정원은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져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유년을 키우고 살찌우고 세상에 눈 뜨게 만든 또 하나의 세계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만큼 걸어온 길 위에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더 멀리 걸어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고 있는 것은 젊음, 청춘의 메아리가 화려하게 꽃 피던 시절이 있었을까 싶은, 굳게 닫힌 사진첩처럼 까마득하고 의뭉스럽기까지 한 인생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조차 나지 않는 그 망각의 험난한 인생길은 내게 다만 지나온 길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들이 잎들을 모두 떨구고 야윈 가지만을 내밀던 그 가을날 내 청춘이 길을 잃고 방황하던 때에 나는 등대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찾아 시린 바람을 맞던 돛대였을 뿐이다. 그때 내가 떠올린 어휘는 오직 ‘안개’였을까? 무겁게 밤을 짓누르던 그 묵직한 습기였을까?


청춘이 바라본 세상은 내게 저 바다 건너 또 다른 대륙을 가리켰고, 도망치는 청춘에게 세상은 호기롭게 손을 내밀지도 않으면서 모든 게 석연치 않은 불투명하기만 한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러했기에 새로운 세계의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나는 수없이 저항했고 회의했다.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던 날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안개를 헤집고 햇살이 내리쬐는 지상의 흙 내음을 맡고 싶었던 청춘을 장례 치르면서 비로소 매장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던 날들이었기에 후회하거나 절망하거나 회의하거나 할 겨를조차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는 다만 내 지난 꿈의 몰락과 희망의 꺾임, 그리고 시간의 덧없는 유영을 장례 치르고만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고 더 도망치고 싶고 더 꿈꾸고 싶었기에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가늠해 봐야 했다. 아무도 붙잡는 이가 없었다. 나는 충분히 자유로워졌고 순순히 내 영혼에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힘이 아직 남아있던 건 다행 중 다행이었다.


누가 나의 발걸음을 방해할 것인가? 누가 내가 걸어가는 길에 발길질을 할 것인가? 누가 이 흔들리는 걸음걸이를 교정해 주겠다고 나서겠는가? 아무도 없었다. 길 위에 서면 모두가 혼자다. 사막에서 낙타는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하지만 그와는 조금 다른 것이 나는 낙타처럼 모래알을 씹으며 바람 부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걸어가지 않을 길을, 누구도 탐내지 않을 길을, 어느 누구도 떠올리지 않을 길을 걸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 길은 끝이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끝이 가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끝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레이몽 끄노(Raymond Queneau)가 이야기했듯이, 저 허공을 날고 있는 나비가 나인가? 아니면 나비인가? 때로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여행의 묘미를 따질 때가 아니다. 여행의 추억에 빠져들 때도 아니다. 나는 충분히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고 걸어갈 것이다. 진정한 여행자는 걸어온 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에겐 단지 다시 걸어가야 할 길만이 등대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오늘의 석양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내 안에조차 어떤 신성(神性)에 대한 의지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르 아브르(Le Havre)
성 요셉 성당 너머로
해가 진다.
석양이 아름답다 느끼는 순간
우리는 자연의 신성(神性)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걸 의미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 뜨는 찰나가
내 안에 신성이 깃드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전 09화 생타드레스 언덕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