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의 성채에 오르다

몽생미셸 가는 길 219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캉의 성채(Château de Caen)


때늦은 점심 식사가 끝나고 테이블 멀찍이 기욤의 성채를 바라본다. 때늦은 시각이지만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니 성곽에 올라가야 할 터였다.


지금의 성벽은 13세기 초 프랑스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가 덧붙여 쌓은 것이다.


기욤은 사생아였다. 부친은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었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니 이를 두고 프랑스인들은 기욤을 바타르(‘사생아’란 뜻)라 불렀다. 우리말로 서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기욤은 서자란 말보다도 더 사납고 난폭한 사생아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걸 극복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천 년 전의 기욤도 자신에게 따라붙는 ‘사생아’란 말을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다만 자신을 사생아라 부른 이들을 겨눈 복수의 칼날만을 품고 살았을 뿐이다.


마침내 허울 좋은 가신들인 남작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사생아 주제에’ 놀리는 프랑스 국왕마저 제압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움켜쥔 기욤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수도를 바다에 면한 캉으로 옮기고는 영국 정벌에 나선다. 그때가 1058년, 59년... 1066년이었다!


기욤은 오로지 왕국의 일인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낳은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어머니는 다른 사내와 결혼하여 또다시 남아를 둘씩이나 낳은 뒤였다. 오동과 로베르가 바로 모친이 시집가서 낳은 자식들이었다. 그런 덕분에 사생아 기욤은 비록 아버지는 다르나 한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형제들을 늘 곁에 두고 그들에게 권력을 나눠주고는 함께 노르망디 공국을 이끌어갔다.


로베르의 충성심, 오동의 지략은 기욤에게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지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천 년 전의 기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암살과 독살이 판을 치던 1천 년 전에 믿을 사람이라고는 오동과 로베르 형제뿐이었다. 적어도 오동이 기욤이 말년에 이르자 기욤을 배신하고 나서기 전까지는!


프랑스 국왕의 섭정인 아버지를 둔 전형적인 프랑스 여인 마틸드와 결혼한 기욤은 공국의 수도만 이전한 것이 아니라 공국에 걸맞은 수도원을 개혁하고 근친결혼이라는 족쇄를 풀기 위하여 교황이 내린 보속을 실천한다. 속죄의 맘으로 캉에 두 수도원을 지은 것이다. 하나는 마틸드의 속죄를 상징하는 아베이 오담므를, 다른 하나는 자신의 속죄를 뜻하는 아베이 오좀므를.


Abbaye aux Dames, Caen.jpg
Abbaye aux Hommes, Eglise de Saint Etienne, Caen.JPG
캉(Caen)에 세워지는 수녀원인 아베이 오담므(Abbaye aux Dames)와 수도원 아베이 오좀므(Abbaye aux Hommes).


기욤은 그럴싸한 궁정 건물 하나 없는 캉의 황무지에 궁전을 짓고 교회를 짓고 거처를 마련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캉의 성채(城砦)라 불리는 샤토 드 캉(Château de Caen)이다.


성문 안쪽에서 방문객을 맞고 있는 안내판


성곽은 평지보다 약간 높은 언덕을 감싸고 있는 형태다. 언덕 높이에는 꽤 드넓은 평지가 자리한다. 그곳에 기욤은 처소를 마련하고 교회를 세우고 마구간과 가신들이 머물 궁정을 지었다.


기욤의 성채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는 철저하게 노르망디를 파괴했다.


1204년 노르망디 공국의 명이 다하는 순간 프랑스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는 기욤의 성채를 완전히 파괴한 뒤, 이를 더욱 확대하여 견고한 방벽을 쌓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더는 바이킹의 후손들이 넘보지 못하도록 그야말로 프랑스의 성채다운 망루가 있는 요새(Donjon)를 짓고 방벽까지 쌓은 것이다.


이 거대한 성곽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되었지만 여전히 노르망디 공국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이 철벽 옹성은 2차 세계대전의 전란으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어느 정도 복원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다. 기욤의 궁정 터에는 한때 법정과 부속건물이 자리 잡았었지만, 현재는 대학과 미술관 행정센터가 들어서 있다. 클로드 모네가 그린 저 유명한 「물안개 피어오르는 에트르타 풍경」도 여기 있는 미술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다.


클로드 모네, 「물안개 피어오르는 에트르타 풍경」, 캉 미술관.


성채로 오르는 길목엔 육중한 문이 자리 잡았는데, 그 문을 통과하면 그야말로 탁 트인 평지가 나타난다. 미술관을 지나 방벽 끝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조망은 그야말로 파노라마에 가깝다. 캉 시가지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성 베드로 성당이 가까이 보이는 전망대는 서쪽 방향인 탓으로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세차다.


아무런 준비 없이 함부로 발을 들여놔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입구의 육중한 성문
성문 이쪽저쪽
4-1 Caen 18 - Notre Dame - 복사본.jpg
4-2 Caen 21 - Panorama de la ville - 복사본.jpg
흐린 날씨에 바람도 거세 시야가 어둡다. 전망 좋은 날에는 멀리까지 캉 도심이 선명하게 한눈에 다 잡힌다.



캉 성채의 오늘날 모습



“무기(장비)의 진화에 따라 성채는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되고, 또한 여러 차례의 손질을 거쳤다. 방벽들은 그러나 11세기 때 지어진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성채의 요새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성벽에 세워진 13개의 탑 가운데 11개가 13세기부터 시작하여 15세기에 걸쳐 직사각형으로 세워졌다. 나머지 두 탑들은 원형인데, 남쪽에 위치한 왕비 마틸드의 탑과 서쪽에 위치한 퓌소 탑이다. 이 탑들은 부르(Bourg) 수녀원과 부르 르루아가 서로 합쳐지는 지점에 세워졌다.


Tour Puchot située au nord-ouest du château.JPG
Tour Mathilde au sud-est.JPG
퓌소 탑과 마틸드 왕비의 탑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망루(donjon)는 깡그리 파괴되고 말았다. 19세기에 성(城)은 병영으로 바뀌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채가 그 역사적 가치를 부여받아 방벽들과 성문들 그리고 부속건물들의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Vue panoramique de l’entree du chateau.jpg 성 베드로 광장 쪽에서 바라본 캉 성채


공작 궁전은 북쪽에 자리 잡았다. 오늘날 대학이 위치한 바로 그곳이 공작 궁전의 터다. 초기 형태의 건물들이 약 40여 년의 세월에 걸쳐 바둑판 모양의 건물에 잇닿아 들어섰는데, 처음에는 생 조르쥬 성당이 들어섰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생 조르쥬 성당과 달리 오늘날 보게 되는 성당은 16세기 때 고딕 화염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다. 교회 지붕 아래 코린트 양식의 처마 까치박공들은 북쪽 지붕 처마 아래쪽에서 보듯 쇠시리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방문할 수는 없지만 망루가 아직도 남아있다. 저 아래 깊이 자리 잡은 해자와 탑을 번갈아 보면서 망루의 상당한 높이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르망디에서 보기 드물게 로마 문명의 건축의 흔적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데, 두 개의 층으로 나뉜 바둑판 모양의 웅장한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창문을 통해 전혀 생각지 못한 빛이 스며들어 천장 가득 환히 밝히고 있다. 대 회의실은 궁정 1층에 자리 잡고 있다. 지상 층에는 부엌과 부속실들이 들어서 있다.” [1]


Salle de l'Échiquier (XIIe siècle).jpg 12세기 노르망디 건축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궁정 건물.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까지 마셨지만, 취기는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찬 기운을 띠지 않은 유월의 바람이 싫지는 않으나 계속 바람을 맞다 보니 뜨거운 차 한 잔이 생각났다. 미술관 카페테리아에서 소금기 묻은 바람을 털어내고 찬찬히 모네의 바닷가 풍경 그림을 바라보고 싶다는 욕망이 앞섰다. 벌게진 낯빛도 가셨으니 입안의 알코올 냄새만 지우면 되었다. 그러면 미술관 관람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누구의 조각작품일까? 오며 가며 내내 궁금했다.


아내와 함께 미술관 쪽으로 걸어가는 도중 생각에 잠겼다. 수도의 중요성!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 하나! 결국 기욤은 바다를 생각한 것이다. 바다를 통해 선조들의 땅인 스칸디나비아와의 연결 고리를 생각해 낸 것이다. 방해하고 나선 영국은 정복하면 그만이다. 이 모든 기욤의 생각과 판단이 이곳 캉 성채에서 이루어졌다. 역사는 그걸 이야기해 주고 있고 오늘 아내와 함께 걷는 이 답사의 길 또한 그걸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다.


Chateau de Caen Coraline et Leo.jpg 샤토 드 캉(Château de Caen), 꼬할린느 및 레오(Coraline et Leo) 사진.


감회가 새롭다. 출장차 여러 번 찾아와서 쓸쓸히 전망대의 망루에 올라 망연히 캉 시가지만을 바라보던 아득한 기억으로부터 오늘 아내와 함께 걷는 길은 행복에 겨운 나들이와도 같다. 그것도 북서풍의 바람기에 반쯤 취한 산책쯤으로 생각해도 괜찮을 듯싶은.


영웅의 삶이란 것도 한시도 한눈을 팔 수 없는 것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소박한 글쟁이의 삶은 어찌해야 할까? 냉정함을 잃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점점 날카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사실 너머 진실을 향해야 할 필요가 분명 있을 것이다. 하기에 이쯤에서 여행은 정신적으로 고독한 답사가 된다. 폐사지에서의 순례도 그러할 것이다.








[1] 미셀 우흐께, 질르 피바흐,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이 프랑스인 세 사람이 써 내려간 역사기행서 『정복왕 기욤의 발자취를 따라서』, 오렢(OREP) 출판사, 파리에서 참조.


Caen Carte.jpg 프랑스 북서쪽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캉(Ca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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