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대신 선택한 성장
일본 지방에서 도쿄로 온 첫 해,
나는 ‘채용담당’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던져졌다.
프런트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내가,
이젠 그 일을 할 사람을 ‘뽑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인사, 면접, 기획…
모든 게 생소했다.
호텔의 전쟁 같은 현장감이 사라지고,
엑셀과 이메일, 회의로 하루를 채우는 일상은
왠지 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시시한 탁상공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
채용이란 단순히 ‘사람을 뽑는 일’이 아니라,
‘회사의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는 걸.
내가 맡은 건 대졸 채용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학생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말과 표정 속에서 진심을 찾아야 했다.
“이 회사에서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일본의 호텔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슷한 대답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가끔은 눈빛이 반짝이는 지원자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로 일본에 왔던 나.’
그래서 가능하면 그들에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줬다.
화려한 호텔의 외면보다,
내 편이 없는 것만 같은 타지에서
악착같이 버티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또 중요한지.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학생들이
“일본에서, 호텔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라는 식의 말을 해 줄 때마다,
이 일의 의미를 새삼 느꼈다.
도쿄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외국인으로서의 나’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지방 호텔에서의 나는,
뭐든 다 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외국인이었다.
하지만 본사에 온 나는,
현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외국인이었다.
즉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고,
맡은 업무 외의 대외활동을 위해선
일본 특유의 비즈니스 매너와 언어 감각도 필요했다.
지방 시절, 일주일에 한두 번 하던 회의는
이곳에선 하루에도 다섯 번 이상 열렸다.
심지어 30분 단위의 회의로 하루가 꽉 채워질 때도 있었다.
처음엔 답답했다.
“왜 이런 중요한 걸 입사할 때 안 가르쳐줬지?”
“난 여기서 뭘 하면 되지? 왜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는 거지?”
하지만 곧 깨달았다.
나는 또다시 배우러 온 것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회사에서든
스스로 생각하고 꾸준히 의견을 내며
행동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신뢰를 얻는다.
채용담당을 맡은 지 5개월 만에
나는 대졸채용팀의 리더가 되었다.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함께 겪은 팀원들과는
지금도 쉬는 날이면 만나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누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결국 외국인으로 일한다는 건
특별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그 안에서 꾸준히 배우고,
나만의 방식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었다.
채용 일을 하며 가장 많이 배운 건 ‘사람’이었다.
면접장 밖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지만,
면접 안에서는 각자의 인생이 있었다.
그들의 긴장된 손끝,
면접이 끝난 뒤의 미묘한 미소.
그 속에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함을 느꼈다.
채용이라는 일은 회사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지원자를 위한 일이기도 했으며,
회사의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일은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려는 일’로 바뀌어 있었다.
직장생활도 결국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난다.
함께 일할 때 마음이 좋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
그게 내가 이 회사를 떠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다.
지금은 육아휴직 중이다.
아침마다 아이의 얼굴을 보며
이전과는 다른 속도와 온도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회사에서 한발 물러나 지난 8년을 돌아보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직장생활’이 아니었다.
배우고, 부딪히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
그게 내 8년이었다.
물론, 언젠가 회사를 떠날 날이 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다.
이곳에서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함께 가야 할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예전엔 늘 “언제 그만둘까”를 생각했는데,
요즘은 “내가 이곳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성장이고,
내가 이 회사에 남아 있는 이유이며,
이 회사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배움이다.
요즘 시대의 퇴사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하지만 ‘모두가, 무조건’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 자리에서도 언제든 다시 배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나는 그걸 선택하고 싶다.
그래서 내년에도 나는,
여전히 같은 회사에 다닐 것이다.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서 8년간 일하며 배운 건,
결국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나 자신'이라는 것도 시기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에,
'앞으로의 나'도 꾸준히 지켜보고, 또 기록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