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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Oct 19. 2017

가을 바다는

 바다는 에메랄드 빛이다.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것 따윈 없다. 잔잔히 밀려오다 슬그머니 흩어지는 물보라로 이래 봬도 바다라고 말한다. 고즈넉한 게 꽤나 신기하여 그걸 가늠하려고 좀 더 시선을 돌린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하늘과의 경계조차 무의미한 일렁임과 맞닿는다. 그 주변에 자욱이 얹어진 물안개 내지는 구름 뭉텅이가 층을 이룬 것이다. 그 희뿌연 경계 때문에, 청춘 같은 에메랄드 빛깔이 청순한 푸른색을 머금을 수 있다. 어디가 바다이고 하늘이면 어떻냐. 그 위로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여객선 같은 층운형 구름이 쓸데없는 시시비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자적 지나가는데. 그 모든 운치와 풍경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내 가슴으로 파고드는데. 



풍처럼 펼쳐진 바닷가는 8월 말부터 폐장됐다는 현수막과 함께, 주인을 잃고 고유의 위엄조차 사라진 부스들로 쓸쓸해 보였다. 그럼에도 베이지색 모래 위로 푸근한 미지근함이 남아있었다. 그 주위로 돗자리를 펴놓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아이들은 역시나 모래 놀이를 하고 있다. 불현듯 어디선가 들은 ‘아이온(Aion)’란 단어가 떠오른다. 영겁의 시간이란 뜻의 라틴어로, 모래성을 쌓고 허물기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 지치지 않고 즐기는 유희를 일컫는다. 누군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래를 보자마자 달려가 파고 쌓고 하는 걸 보니 즉흥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들은 잔잔한 미소로 거침없는 손놀림을 구사한다. 동화책에서나 봤을 법한 성과 요새를 척척 쌓아 올린다. 하나, 지켜보는 어른들은 그렇지 못하다. ‘잘 노네!’란 감탄을 몇 마디 연발하거나 같이 모래 탑 쌓기를 하다가 알아서 놀라는 듯 슬쩍 자리를 뜬다. 돗자리 위에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모으고 양팔로 감싼 채 꼿꼿이 허리를 편다. 잠시 아이들을 주시하다가 눈길을 돌려 바다로 향한다. 물감으론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빛깔에 감탄하던 아까의 마음은 어느새 무덤덤하다. 나른한 나머지 하품 몇 번에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구부정해진다. 오래간만에 마주한 바다에 흥분했던 마음으로 떠들었던 대화조차 시들해진다. 게다가 마땅히 마시거나 먹을 게 없다면 더 이상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제 그만 갈 시간이야’를 외치고 더 놀겠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끌어내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온다. 에어 건으로 자신들과 아이들의 모래를 털어내면서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한 손엔 짐을, 다른 손에 아이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모습들이 조금 힘겨워 보인다. 반면, 한 손이 자유로운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날개라도 펼칠 것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고 파닥댄다. 



늘은 점점 불게 물든다. 물안개처럼 펼쳐진 경계선 위로 주홍 빛 태양이 걸쳐져 빼꼼히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가을의 해는 붉은 사과도, 새콤달콤한 오렌지도 아닌, 나무에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홍시 같다. 에메랄드 빛 위에서는 보색인 잘 익은 홍시 빛이 기가 막힌 대조를 이룬다. 그 모습에 팔을 뻗을 수 있다면 닿을 거란 착각에 빠진다. 즉흥적으로 둥글게 만 손을 내밀어본다. 만질 수 없는데도 왠지 풍성하고 따뜻한 기운이 손끝에서 온몸으로 전파되는 것 같다. 사진이 아닌 마음으로 담을 수밖에 없어 아쉽다. 그래서, 바닷속에 서서히 몸을 맡기고 시뻘겋게 물들어가는 태양을 놓지 못한다. 일몰을 주시하는 건 그 하루에 대한 내려놓음과 회환이다. 저 뒤로 넘어가듯 순식간에 사라지는 찰나는 강렬한 긴장과 여운이다. 만약 놓친다면 다시는 그 장관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후회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별일 없이 보낸 하루를 또다시 마감하고 말았다는 책망 섞인 자조도 있다. 오늘 내가 뭐 했지. 이걸 보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내달렸고 화사한 빛깔의 바다 앞에서 잠시 숨이 멎었다. 금세 무료하고 지친 나머지 자리를 뜨고 말아, 이제야 네가 가는 길에 동참하고 있다. 생각보다 짧은 감흥과 옅은 감동 속에서 정작 만끽하고자 했던 일탈과 자유는 어느새 지나갔다. 어쩔 수 없이 저 속에 떠나보내고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란 영화 대사에 위안을 삼는다. 그렇게 자조 섞인 내 마음을 알아차린 바다는 잠깐의 휴식 후 찾아오겠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검붉은 빛깔로 흡수된다. 고고하게 유유히 흘러갔던 구름선(船)마저 그 속에 숨어들어 자취를 감춘다.  



다가 짙은 어둠을 받아들이자 신이 마치 검은색을 스포이드로 떨어뜨린 듯 모든 것이 검게 물든다. 그제야 인간의 능력이 발휘된다. 청포도나 산딸기 밭처럼 영근 과실 같은 불빛이 도로와 나무 위 혹은 지붕에도 피어난다. 절벽 위에 하얀색과 푸른 지붕이 반사된 지중해풍 리조트 주위로 번쩍번쩍하다. 한편으론 꽤나 작위적이어서 인공 과일 향으로 유혹하는 알록달록한 드롭스 캔디 같다. 리조트 꼭대기에 자리 잡은 아담한 광장에선 그 전경과 칠흑 같은 바다를 한눈에 가늠할 수 있다. 그곳에 닿고 싶어도 인공의 빛으론 천혜를 담아낼 수 없다. 차라리 이국적 정취 속에서 있다는 증거와 어우러짐을 찾는 게 낫다. 대부분이 더 나은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지나치게 부산스럽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카메라 플래시는 불꽃놀이나 별빛이 쏟아지는 장관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 홀로 뒷짐을 지고 울타리에 바싹 붙어 철썩 이는 바다와 마주한다. 네가 뭐라고 하던 나는 너를 보고 말 것이라는 듯. 그러나, 너는 이 작은 관심조차 단호히 거절한다. 아무리 보려 해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듯. 인공의 빛 이외엔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무기력 앞에서 금세 지쳐간다. 아까는 해맑고 눈부셔서 그랬고, 지금은 감추고 있어서 그렇다. 바다는 요물이다. 끊임없이 유혹하면서도 가까워지려는 순간 경계한다. 그 거리감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게 하면서 스스로를 신비롭게 포장한다. 그 알쏭달쏭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음 날의 바다는 잿빛이다. 무엇에 화가 난 것인지, 혹시 태양이 선명한 주홍 빛을 먹구름 속에 숨긴 탓일까? 출처를 알 수 없는 저 멀리 어딘가로부터 맥박보다 빠른 성난 파도가 밀려왔다. 해변 가에는 모래와 뒤엉킨 흙빛 물보라가 일었다. 그걸 한방이라도 맞는다면 금세 떠밀려 내려가 이름 없는 섬 위로 불시착할지 모른다. 텅 빈 모래사장 위엔 어제 쌓았고 새겨 놓았던 흔적들이 몽땅 사라졌다. 비바람마저 포효한다. 해변가 위의 나무들이 갈팡질팡한다. 알 수 없는 파도가 그것이 휩쓸고 지나간 자취에 허우적대는 모습에서, 누구도 동참하지 않는다. 슬쩍 피해 차 안에서, 카페에서, 숙소에서 바라볼 뿐이다. 인간이 거부하는 거친 자연이라 황량하고 쓸쓸하며 거대하다. 바다를 만만해했던, 아니 거리감을 부정했던 내 생각이 과욕이었던가 되짚어본다. 항상 일말의 간격을 앞에 두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떠나야 했던 내가 이번엔 기필코 다가서려 했는데. 어떻게든 가까워질 수 없는 너는 최소한의 간격으로 막아선다. 자연의 힘을 빌어 또다시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나의 관심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영원한 무엇으로 남고 싶은 너는 갈대 같은 모습으로 어떤 고유성을 거부한다. 가을 바다란 수식어도 무의미하다. 바다는 무정형이고 무질서하며 비결정성이다. 다가가면 한 걸음 물러나고 재촉하면 뛰어가는 바다로부터,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에 닿기 위해, 평온한 화사함도, 음흉한 어둠도, 신경질적인 거침도 받아들이려 했다. 미약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주 보는 것이었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멋대로 폭주하는 너와 달리 나란 그저 지킬 뿐.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뜨고 자기 전까지 너를 주목해야 했다. 수없이 그 해변가를 배회하며 돌아다녔다. 또, 전망 좋은 카페나 테라스에 앉아 쓰디쓴 아메리카노와 부드러운 카페 라테를 들이켰다. 그 48시간 동안의 커피 값이 밥 값보다 더 될 것이다. 그와의 몇 마디, 아이들과의 눈 맞춤 대신 온통 너였건만. 내 마음속에 담긴 너의 인상들은 종잡을 수 없고 오락가락한다. 그게 너의 매력일까? 귀가하는 차 안에서 분하고 아쉬운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올해의 마지막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한다. 이 또한 너를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의 방식이다.  






어떤 계절에도 바다는 낭만적이고 이상적이어서, 
그곳의 경험도 대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충족하지 못했을 때의 실망감과 아쉬움이 남은 채 떠나야 한다면, 
며칠 동안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공허함에 다가간다면 지금보다 낫겠다는 생각에서, 
흔적을 따라 주절주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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