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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Nov 01. 2017

다시 만난 가을

침에 문득 창 밖을 보는데, 건너편 빌라 옥상에 소담스러운 둥근 박들이 뒹굴고 있다. 아기의 뒤통수처럼 올망졸망 모인 것이 귀엽다.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잎사귀로 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까꿍’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어쩐지 우중충한 회색 빛 하늘에 폭죽이라도 터지는 듯 느껴진다. 높은 건물 사이로 그것을 발견한다는 건 어색하면서도 신기한 일이다. 내 생전 처음으로 마주친 박이기도 하다. 기껏해야 전래 동화 속 그림에서나 접했던 것이다. 흥부네처럼 작고 소박한 초가집 지붕 위에 열린 것을 따다가 쓱싹쓱싹 톱으로 자르면 금은보화나 쌀이 가득 쏟아질 줄 알았다. 근데 막상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고 오종종한 모습이라니. 게다가, 어떤 편견 따윈 아랑곳없는 듯 삐죽 튀어나와 자신 좀 봐달라는 듯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록색에서 차츰 누런 빛깔로 익어가는 모습은 난데없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긴 추석 연휴를 지나 미룬 일들을 처리하느라 10월이 다간 줄도 몰랐다. 아침으로 쌀쌀해진 찬 바람 때문에 스웨터나 패딩 점퍼를 찾을 줄만 알았지 미묘한 절기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다. 가을은 나에게 제법 많은 추억을 환기시키는 계절이다. 한때 이맘때가 되면 문학소녀라도 되는 양 한껏 감수성이 예민해졌다. 방금 전까지 고개가 넘어갈 정도로 웃었다가 금세 우울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팔짱 끼고 걸어가는 친구들 뒤에서 홀로 터벅터벅 걸었고. 괜히 브라운톤 메이크업을 고수하거나 책 하나를 옆에 끼곤 낙엽이 쌓인 길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럴 때면, 친구들은 또 시작이라는 듯 슬그머니 피해주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낯 뜨겁고 화끈거리지만, 정말 그랬던 때가 있었다. 아마 지금처럼 무감각해지기 시작한 건 앞가림하느라 바빠졌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면서 서서히 가을에 대한 감흥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땐 하루하루가 치열하고 고단했으니까, 야릇하고 오묘한 자연의 변화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그런 정취나 낭만을 잊고 있었다. 근데 오늘 우연히 본 박 때문에 건조한 감성에 촉촉한 온기와 습기가 더해졌다. 굳었던 마음이 조금씩 말랑거리고 촉촉해지자 몸까지 덩달아 붕 떴다. 오래간만에 트렌치코트를 꺼내 만지작거린다. 유행을 안타는 기본 스타일이라 버리지 못하고 꽤나 오랫동안 썩혀 두고 있던 것이다. 몇 년 전 영화에서 빈티지 코트를 꽤나 멋스럽게 소화했던 여배우를 떠올리며 걸쳐본다. 역시나 그녀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촌스러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칼라가 꽤나 넓어서 지나치게 좁은 어깨를 모두 가릴 태세다. 트렌치코트를 걸쳐야 가을 패션의 완성인데. 입고 돌아다녀도 되는지 살짝 고심된다.



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커피 한 모금이 절실해진다. 동네 친구를 불러 같이 가도 좋으련만, 오늘은 왠지 혼자 있고 싶다.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낯선 곳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홀로 덩그러니 방치되어도 스스로 괜찮다, 멋지다 생각되는 날. 커피숍에 혼자 있으면 생각보다 심심하지 않다. 하고 싶었으나 못했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그 시공간만큼은 온전히 나를 위해 존재하니까. 집에서 몇 정거장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로 발길을 옮긴다. 종종 들리는 동네 커피숍도 고즈넉하나, 오늘은 왠지 많은 사람들 속에 나 혼자인 고독한 군중이고 싶다. 이 시간에 그럴만한 곳이 딱 거기였던 것이다. 예상대로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대부분 나처럼 혼자 왔다. 그들은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나도 동참하기 위해 서둘러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콘센트가 근처에 있는 1~2인용 탁자를 고른다. 노트북을 꺼내 얼른 Wifi를 잡는다. 인터넷에 연결되고 커피가 도착하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따뜻한 한 모금을 넘기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유리창 밖으로 눈길을 돌린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쌀쌀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바쁜 듯 걸어 다녔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 브라운 빛깔로 물들인 나무와 낙엽들, ‘가을 마지막 세일!’, ‘얼른 월동 준비하셔야죠’란 현수막이 즐비한 상점들 속에도, 가을이 있었다. 가을은 단순히 날씨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고 남긴 자취와 정취에서 형성된다. 반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마치 가을이란 풍경화를 바라보는 갤러리 속 관람객처럼. 화려한 차림으로 브런치를 즐기며 ‘티파니(TIFFANY&Co.)’를 바라보지만 정작 갖지 못하는 ‘홀리(오드리 헵번)’처럼. 가을을 느끼겠다고 작정했지만 정작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고 있다. 막상 저 쌀쌀하고 스산한 기운에 뼈마디가 시릴까, 혹은 저 낙엽을 만지다가 괜히 은행 열매를 밟으며 구린내를 맡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어쩐지 맛만 보고 멋만 내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을 핑계로 커피 한잔 마시러 나온 거 아닐까? 



처럼 가을에 다가서지 못한다. 방관자처럼 바라보다가 금세 무료하고 지쳐서 모든 걸 다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는다. 사실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도 내 열정이 충족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삶 대신 마음 내키는 대로 흔적을 좇는다고 해도 뜬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기분 속에서 남겨져 허무할 테니까. 가을을 담은 사진이나 책 글귀, 몇 날 며칠을 울고 웃긴 감상문도 불타올랐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가을은 그냥 잠시 머물다가 다시 그 자리를 겨울에 넘겨주고 떠나는 잔정 없는 나그네 같다. 더 이상 소녀가 아닌, 아이 둘을 가진 아줌마는 그걸 붙잡을 용기가 없다. 낭만이란 훨훨 날아오를 날개 옷을 꺼내지 못하고 무덤덤한 연륜 속에 빨려 들어간다. 여기서 일탈이라는 것은 가끔씩 콧바람 한 번이면 족하다. 수다나 사색, 혹은 회상 속에 잠시 빠졌다가, 그 힘으로 또 며칠을 버틴다. 그런 쳇바퀴 속에서 올해의 마지막 불꽃같은 가을은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간다. 여태까지 겪어왔지만, 어떻게 해야 실낱처럼 그것을 붙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나에겐 그런 열정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고백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차라리 매년 꼬박꼬박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지 모른다. 



러나, 트렌치코트와 커피, 낙엽과 책의 쳇바퀴에서 가을이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우연히 마주친 박과의 첫 만남으로 두근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정겨운 이야기 속에서도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오늘은 유난히 심장이 쿵쾅쿵쾅 할 정도로 주저앉는다. 회색 빛 서울 하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도, 생각보다 작은 크기도, 무더운 습기와 햇볕을 잘 견디고 고개를 내민 것도. 누군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경쾌함과 발랄함으로 저절로 여물어간다. 의로움도 신비함도 풍족함도 아닌, 스스럼없는 어울림이다. 그런 당찬 용기가 재미있어 들여다보면 보는 이마저 밝아진다. 그렇게 이 스산한 가을에 온기를 더한다. 어떤 감수성으로 끌어당긴다. 쓸모없는 풀잎 하나 없다고 했다. 하찮은 생명이나 삶도 없다. 모든 것이 이치에 맞게 솟아나고 어울린다. 이 계절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 혼자 바쁜 척, 관심 없는 척 혹은 주제넘다고 생각 말고. 누구나 마음만 있다면 이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자격이 있다. 작고 귀여운 동그라미들이 그걸 일러주는 듯하다. 그 감흥에 덩달아 달아오른 나는 마음 속 사진 한 컷을 과감히 찍어버린다. 어쩌면 또 다른 흔적이 생긴 건지 모른다. 이제 가을 하면 저들도 떠오를 것이다. 갑자기 시골 시댁의 슬레이트 지붕이 떠올랐다. 조만간 제사 지내느라 방문해야 하는데, 그 동네 어딘가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고속도로를 달리며 차창 밖 전원 풍경 속에서도 그 자취를 찾고 있을지 모른다. 서울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면서. 알록달록 물든 나무들과 어떤 어울림을 보여줄까? 나는 또 어떤 낭만의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을까? 





내년 이 무렵에도 다시 가을을 느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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