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차 베를린 :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코로나로 인해 여행이 힘들어진 2022년에 자유로이 다니던 시절이 그리워
2019년 가을 베를린 여행기를 올려봅니다.
2019/10/12
그리스 여행에서 돌아온 집주인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5~60대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인데 자신은 영화, 방송 쪽 의상 디자이너로 일한다고 소개했다. 활발하고 유머도 풍부한 매우 친절한 분이었다. 세탁을 해주시겠다고 하여 염치 불고하고 부탁을 드렸다. 에어비앤비가 좋은 점은 현지인과 다이렉트로 꽤 깊이 있는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제 브란덴부르크 문을 갔으니 오늘은 체크포인트 찰리를 거쳐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가보기로 했다. 그동안 서베를린 중심으로만 다녔기에 동베를린은 처음이었다. 흔히들 요즘 핫하다고 하는 베를린은 생동감 넘치는 예술활동을 배경으로 한 동쪽이었기에 여러모로 기대가 되었다.
먼저 체크포인트 찰리에 도착했다. 분단 당시 장벽이 어디에 위치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커다란 지도가 인상적이었다. 스필버그 감독의 스파이브릿지라는 영화를 보면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사이에 장벽이 세워져 가족과 헤어지는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지도를 보니 더욱 실감이 났다. 정확하게 동서로 나뉜 것도 아니고 마치 울타리를 치듯 둘러싼 형상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정황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장벽이 제거던 자리에는 다른 모양의 벽돌로 흔적이 남아 있다. 동서 진영에 한 발씩 딛고 사진을 찍는데 느낌이 묘했다.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이 만날 때 아무것도 아니지만 큰 의미가 있는 선 하나를 왔다 갔다 하던 모습이 연상되었다. 애초에 자신의 땅도 아닌 곳에 맘대로 선 하나를 그어놓고 넘어가면 죽이고 갈등하는 모습이란 얼마나 어이없는 행태인지..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지나가고 어린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과거에 이 선을 넘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렸었다는 것이 먼 옛날의 일처럼만 느껴졌다. 내가 처음 독일에 왔던 89년만 해도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국가였고 그 해에 장벽이 무너졌으니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나라도 비무장지대에서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는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다. 오늘은 장벽의 흔적들을 확실히 파기로 했다. 동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전철 창 너머의 풍경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정갈하고 자연친화적인 서쪽에 비해 삭막하면서도 할렘스러운 느낌의 화려하게 수놓은 그래피티들이 점점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안정(그리고 치안도 불안) 해 보이지만 확실히 생동감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역에서 내려오면 삭막한 공원을 지나 오베르바움 다리가 나온다. 고풍스러운 다리와 현대적 그래피티의 언발란스함이 이상하게 조화롭게 느껴졌다. 다리는 공사 중이었다. 흩날리는 돌가루를 뚫고 다리를 건너니 장벽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벽이 강가에 위치했기에 현지인들이 여유롭게 즐기는 모습과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의 모습이 대비되어 눈에 들어왔다. 도시 한가운데에 장벽을 세웠다는 것이 굉장히 몰상식하게 여겨졌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랬기에 그만큼 쉽게 통일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분단 당시엔 서베를린 쪽 청년들이 이곳에 와서 힘내라고 응원하고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애초에 소리 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까웠고
마음의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쉽게 허물어졌던 것은 아닌지..
우리의 경우 비무장지대의 지뢰밭을 지나 몇 겹의 철조망을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 독일보다 더 악조건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도 찍고 강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한참 보내고 자리를 뜨는데 아차 싶었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의 키스 그림을 꼭 봐야지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까맣게 잊고 찾아볼 생각도 안 했던 것이다. 나이가 드니 가끔 말도 안 되는 실수들을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래도 뭐 시간은 많으니 다음에 다시 한번 들러야겠다고 위안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교통편이 그다지 좋지 않다. 빙빙 돌아서 여러 번 갈아타야 서쪽에 갈 수 있다. 가는 길에 여행책자에서 봤던 그린 마켓에 들려보기로 하고 버스를 탔다. 그린마켓은 지도상 시청 근처에 있었다. 시청을 볼 생각은 없었는데 얼떨결에 들리게 되어 베를린의 상징과도 같은 TV타워와 시청 사진 몇 장을 건질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 그린마켓에 갔는데 텅 비어 있었다. 구글맵을 수차례 확인해도 없었다. 분명히 베를린 소개 책자에는 있었는데.. 아마도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마켓이었나 보다.
허무함을 뒤로하고 저녁 약속 장소인 조카 집으로 향했다. 선물로는 으슬으슬한 베를린 필수템인 한국산 찜질팩을 챙겨갔다. 간만의 한식 식사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김치찌개를 먹으니 그동안의 배앓이가 깨끗이 치유되는 거 같았다. 확실히 나이가 드니 현지 음식만 먹기는 버거운가 보다. 조카며느리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고기 퀄리티가 워낙 좋아 한국에서의 김치찌개보다 맛있었다. 아니 독일인들은 이런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맛없는 음식들을 만드는지 그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11시가 넘어갔다. 늦었지만 주말엔 대중교통 걱정이 없다. 24시간 운행하기 때문이다. 식재료도, 맥주도 싸고 맛있는 베를린이 점점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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