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내가 입사할 당시엔 그룹 연수라는 것이 있었다. 각 계열사의 신입사원들이 한 조당 20여 명/10개 조에 배정되었고, 기간은 약 3주였다. 여러 차수가 계열사의 연수원에서 진행되었는데, 나는 운이 좋게도 서울에서 30분 거리의 연수원으로 가게 되었다.(같은 해 입사한 사원들은 동기가 되며, 가장 먼 연수원은 지리산 산청에 있었다) 연수라는 게 그저 강의 듣고 회사에 대해 배우는 따분한 것이려니 했는데, 똥군기 잔재(라고 나는 생각하고 회사는 단체 활동에 필요한 것을 배운다라고 주장할만한)라고 할만한 것들을 시켰다.
먼저 가장 황당했던 건 의미 없는 대결을 위해 학창 시절에도 해보지 않은 단체 응원 율동을 연수 기간 내내 외우게 했다.(무엇을 위해?) 극기훈련과 아침 구보, 산행도 시키고(그나마 우리의 구보는 주변 아파트 민원에 의해 중단되었다!), 생뚱맞은 곳에서 물건을 팔게 하고(나는 난생처음 가보는 인천역에 떨어뜨려졌고 디카를 팔아야 했는데, 2인 1조의 대부분 인원이 그 카메라를 다 팔았다는 게 신기하다. 물론 가격 메리트가 있긴 했지만 현금 입금만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더하여 회사의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하는 연극까지 했다.(전문 연극인들의 도움도 있었다!) 이 외에도 정말 많은 것들을 했는데 왜 해야 했고(왜긴, 까라면 까야지), 무엇에 도움이 되기 위해 잠도 못 자고 꾸역꾸역 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덧, 물론 누군가에겐 재미있는 경험이었을 수도 있다. 위의 감상은 100% 나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밝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석사들이 많았던 우리 차수는 이것들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에 따라 미션의 퀄리티보다 잠을 택했는데, 매일밤 12시가 넘어 일과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일찍 잠드는 차수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덤으로 선배들의 ‘라떼는…’을 동반한 무용담까지.
처음 조를 배정받고 얼마간은 서로 서먹하니 나이도 학력도 알 수 없다. 그러다가 초반 유격훈련 비슷한 것을 하는 날 조교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빠지지 않는 서열 정리, 즉 나이 까기가 진행되었다. 군대를 다녀와 석사까지 한 남자들의 나이가 나와 비슷하거나 어렸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당연히 몇 안 되는 여자들 중 누구도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 예상치 못했는지 내 나이를 듣자마자 매우 놀라워했다.(그게 그리 놀랄 일? 아직도 그들의 표정이 생생하다) 그 후엔 어떤 일이 벌여졌냐고? 몇몇은 호기심에 다가왔고 몇몇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더니 조를 좌지우지하려 하고 뒤에서 나를 까고 다녔다.(더불어 그들의 특기인 어린 여자 공주 만들기도 포함) 오랜만에 겪어보는 찌질한 남자들의 연대였다.(일부였음을 다시 한번 밝힌다) 이후 자사 연수를 거치면서 이런 패턴은 반복되었는데, 이젠 뭐 하고 사는지도 모르는 그런 인간들을 그래도 동기들이라고 결혼식까지 찾아가며 축하했던 내가 안타깝다. 뭐 그냥 나의 중심을 잡지 못했던 순진했던 내가 사회를 배우는데 들인 감정적/금전적 수업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몇몇의 남자들에게 공격(?)당했던 이유를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내가 나이도 많아 불편한데 기까지 쎈 여자'였다는 것이다. 나는 목소리 톤이 높고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 편인데(물론 남의 의견 듣는 것도 좋아한다) 이것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 자신들이 불리한 경우 내가 의견만 말해도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비난했다.(그래… 타고난 천성을 누르고 조곤조곤 간드러지게 말하지 못한 내 탓이라 치자) 하지만 기가 쎄다는 건 어처구니없게도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음을 돌려 까기 하는 거였다. 즉 ‘기가 쎄다 = 고분고분하지 않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냐고? 나랑 똑같이 말하고 행동해도 남자는 그냥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으니까.
어린 시절 나는 매우 내성적이어서 자기주장은커녕 어색한 상황에서는 그저 웃는 아이였다. 그때 내 주변 사람들(또래, 오빠/언니, 과외선생님 할 것 없이)은 내가 그들을 좋아한다고 착각했고(특히 이성들!), 나를 이용하고 바보취급했다. 그런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내가 깨달은 건 명백했다. ‘나를 지키는 건 나 자신'이라는 것. 원래의 성향+주변의 영향으로 나는 주관적인 힘을 길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기가 쎄다'로 욕먹는 일이 될지는 몰랐지만 사실 난 별로 상관없었다. 자사 연수, 업무 배치를 거쳐 무려 14년간 일을 해나가며 이런 나를 어떻게든 고분고분 만들어야겠다는 찌질한 인간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앞으로 그 파란만장한 회사 생활이 펼쳐질 예정)
만약 당신이 여성이고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성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두 가지만 기억하라. 1. 정치적인 남자들 입안의 혀처럼 굴 수 있는 나긋나긋함(feat. 명예 남성화, 왜냐면 아직 대부분의 상사들이 남자들이다!)과 2. 알코올 친화력(인내가 필요하긴 하지만 전자가 장착된 인간이라면 이 정도는 껌이겠지). 여기에 기본치의 수학 능력만 있다면 당신은 성공할 수 있다.(성공의 기준이 승진이라면 그렇다는 말) 아직까지 대기업엔 그들만의 리그가 확고하고, 대부분의 일이 몇몇의 정치질에 의해 좌지우지되며(feat. 눈뜬장님 상사들), 업무 능력보다는 인맥이 중요하고, 이러한 것들을 개선시킬 여지가 있는 사람들은 이미 나가고 없다. 그런 곳이 내가 몸소 느낀 우리나라의 대기업이다.
덧, 물론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개선을 위해 노력하던 이들은 떠나거나 그들이 욕하던 인간들과 같아졌다. 물론 그들을 백만 번 이해할 수 있다. 그들도 자신의 구원이 우선이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