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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나 Mar 22. 2024

니가 아픈 건 내 알바 아니고 나는 보고서를 원해

그렇게 필요하면 직접 쓰시던가요

  회사에서 괴로운 일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기억에 박힌 에피소드들이 몇 있다. 머릿속에서 동영상처럼 재생 버튼을 누르면 시작되는 장면. 그날의 온도와 습도까지 다 기억나는. 나에게 그런 날 중 하루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다.


  내가 일하던 사무실은 큰 회사의 건물들이 그렇듯 한여름엔 냉방으로 춥고 한겨울은 난방으로 덥고 건조한 곳이었다. 업무 특성상 창문이 없어 바깥 날씨를 알기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그날은 비가 온 탓에 공기 중에 두둥실 떠다니는 축축함을 느낄 수 있는 날이었다. 여름 감기에 걸렸던 나는 어찌어찌 출근을 하긴 했지만 몸이 점점 아파와 반차를 내고 기숙사에 가서 쉬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들 그렇지 않은가… 그럴 땐 꼭 일이 터지는 법. 내가 굳이 출근했던 이유도 긴급한 이슈에 자신이 들어가서 발표해야 하는 회의자료도 지손으로 만들지 못하는(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성과는 모두 지가 챙기려는 무능한 상사가 필요로 하는 보고서 때문이었다. 그는 부하직원이 아프든 말든 입으로만 일하며 그저 다그칠 뿐인 인간이니까.


  사무실에 앉아 보고서를 쓰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머릿속에선 계속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아픈 몸으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만 맴돌았다. 안 그래도 감기로 줄줄 흐르던 콧물에 눈물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폭포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숨죽여 울며 보고서를 쓰고 있는데 부서장이 들어왔다.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이냐고, 지금 보고서가 대수냐고 얼른 들어가서 쉬라고 말하셨다. 물론 그분이라고 긴급 앞에서 내게 보고서 쓰기를 멈추라고 말하긴 어려웠을 테지만 어쨌든 말만이라도 걱정을 해주는 게 위로가 되었다. 나는 눈물 콧물 흘리며 ‘긴급인데 어떻게 그냥 가요. 이거 마치고 들어갈게요’라고 대답하며 어찌어찌 보고서를 다 써서 보낸 후 퇴근했다.


  나를 걱정했던 부서장은 나를 다그치던 상사가 무능하다고 욕하던 분이었고 결국 퇴사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대부분 일 잘하던 여성 동료들을 챙겨준 것도 그분이었고, 나 또한 그분 덕에 그들만의 리그에서 승진도 할 수 있었다. 내가 열이 펄펄 나도 지 손으로 보고자료 하나 쓸 생각 따위 없던 나의 무능한 상사는 결국 쌓인 연차와 정치질로 승진하고 나의 고과권자가되었고, 신입시절의 나에게 ‘술을 가르치지 못했다는 애통함'을 회식 때마다 토로하였지만 일에서는 단 한 번도 나를 챙겨주지 않았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전 회사에서 피고용인은 월급을 받고 그 월급에 상응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었다. 하지만 역시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히만 돌아가지 않았다. 무능하지만 약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갈아 넣어 만든 결과물을 자신들만의 성과로 만들고, 그들만의 리그는 그것을 답습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물론 '기가 쎈' 여자였던 내가 이런 일을 그냥 넘기진 않았고 면담 때마다 어필하고 불합리를 얘기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계란이던 나만 부서졌고 그 결과 나는 좋은 고과를 받은 적이 없다.


  이런 나의 상황에 대해 '그들만의 리그' 중 한 명은 나에게 내가 일을 잘하면서도 좋은 고과를 받지 못하는 것이 내가 그 상사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역시나 대기업에서의 좋은 고과는 정치질보다는 능력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고 이미 부서진 나는 더 이상 싸울 힘도 없이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덧, 얼마 전 카톡정리를 하는데 위의 되지도 않는 조언을 한 인간의 상태메시지가 '그들만의 리그'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 단어만 보고 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 그들만의 리그'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기는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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