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2011년 8월 석관동 다세대 주택
2010년 초, 집주인이 보증금 7000만 원에 매달 50만 원씩 월세로 지불할 거면 계속 살고 아니면 나가라는 식으로 통보를 했다. 4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전세기간이 다 돼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길래 그대로 자동 갱신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아내의 직장 근처로 집을 얻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동대문구 근처로 이사할 곳을 알아봤다. 싼 곳은 다 이유가 있었다. 입지요건이 나쁘던가, 아니면 너무 구석에 있어서 아내 혼자 귀가할 때 밤길이 위험해 보였다.
그러다 동대문구와 버스 정류장으로 2~3 정거장 떨어진 성북구 석관동 쪽 집을 보게 됐다. 다행히 한국예술종합학교 앞에 지은 지 3년 정도 된 다세대 주택에 빈자리가 있었다. 전에 살던 전농동 집 보증금과도 같은 금액에 계약할 수 있었다. 예전 집보다 절반 정도로 좁았지만 나름 수납공간이 있어 크게 불편할 것 같진 않았다. 집을 둘러본 아내도 나름 만족했다. 그렇게 말 많고 탈 많던 전농동 단독주택을 떠나 성북구 석관동의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은 1층은 주차장(4대 정도), 2층과 3층에 각 2세대, 4층 1세대 총 5세대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중 난 201호에 살게 됐다. 나름 신축 건물이라 전에 살던 전농동 집과는 달리 집수리로 때문에 받을 스트레스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큰 오산이었다. 이사 온 지 2달 만에 벽에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 꼬박꼬박 환기했는데 세입자인 우리 부부의 잘못이 아니었다. 집주인에게 전화해 현재 상황을 얘기했더니 흔쾌히 도배업자를 보내서 다시 도배해놓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알고 보니 집주인이 2명인데 그중 1명이 공인중개사 일을 하고 있어 세입자의 사정을 쉽게 이해한다는 4층 이웃의 말도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집주인을 만났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집 도배 건이 지나고 이사온지 1년쯤 돼가는 겨울이었다.
강추위로 인해 오수관이 얼어붙어 변기에서 물이 역류하고 있었다. 2층에 사는 나로서는 위에서 화장실을 쓸 때마다 변기에서 물과 오물이 흘러넘치는 아주 불쾌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옆집인 202호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서둘러 3~4층에 우리 집 상황을 얘기하고 당분간 오수관 고칠 때까지는 화장실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집주인에게 전화했다. 집주인은 내 말을 듣더니 요새 자금이 돌지 않아 힘드니 그 정도는 알아서 고치라고 했다. 아니면 아래에 말한 대로 잠시 집을 빼 달라고 했다.
확정일자 받은 전세계약을 무효 처리(전세보증금에 대해 내가 1순위 채권자임을 포기하라는 말) → 내가 며칠 동안만 다른 곳으로 전입신고하면 집주인이 그 사이 비어있는 집을 담보로 1억 정도 더 대출을 받을 예정 → 집주인이 대출받은 후 다시 전세계약을 맺음(선순위 채권자 : 집주인에게 대출해준 은행, 후순위 채권자가 나) 즉, 내가 서류상 다른 곳으로 전입신고하면 이 집은 빈 집이 된다. 그다음 집주인이 원하는 만큼(아마도 집을 담보로 나오는 최대한의 금액을 대출받지 않았을까 싶다) 대출을 받고 현재 보증금대로 내가 입주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세입자들이 선순위 채권자로 있는 상태(전세계약서에 확정일자 받으면 선순위 채권자가 됨)라 더 이상 대출받을 수 없다는 핑계도 덧붙였다. 사정이 어려워서 그러니 집주인들을 믿고 잠시 집을 비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부탁이어야 들어주지, 일이 나쁘게 진행되는 경우 덜컥 전세보증금을 날릴 수도 있는데 부동산을 한다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보증금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가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냐고 말했더니 그에 대한 대답은 그저 본인들을 믿어 달라고 하는 것밖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화장실 변기에서는 각종 오물이 역류해서 냄새가 나고 이 상황을 잠시 보러 온 집주인은 대출을 더 받게 해 줘야 수리해주겠다고 한다. 그저 자기들을 믿으란다. 아무 손해 없을 것이다. 대출만 조금 더 받으면 된다, 아주 악마의 속삭임이 따로 없었다. 집주인에게 대답했다. “전 사람은 믿지만 돈은 안 믿습니다, 서류상 전입신고 철회 못합니다” 그 말을 들은 집주인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마 세 들어 살던 5세대 중 내게 제일 먼저 물어봤던 건데 내가 처음부터 안된다고 하니 언짢았던 모양이었다. 그건 집주인의 기분일 뿐, 나 역시 전세보증금이 재산의 전부여서 집주인의 허황된 말만 믿고 그 돈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집주인은 수리 못해준다고 버티지, 다른 층 사람들은 화장실을 못 쓰니 불편하다, 도대체 수리는 언제 끝나냐 계속해서 불만을 제기했다.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나? 인터넷에서 업체를 검색해 전화했다. 5곳의 업체에 전화했을까? 그해 겨울 추위가 심해서인지 유난히 동파 사고가 잦았다. 그 때문에 요새 바빠서 1주일은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행히 이웃집에서 수리업체를 수소문해 겨우 수리 예약을 잡았다. 이웃집을 수리한 김에 옆집인 우리 집에 오물이 넘치는 것까지 한 번에 수리하고 비용은 각자 계산하는 걸로 얘기가 마무리됐다.
집주인이 대출 관련 얘기를 내게 먼저 하고 난 후 다른 세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으니 잘 판단해서 말씀하세요, 대신 전 집주인의 추가 대출에 찬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집주인에 앞서 전했던 게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이웃집의 도움으로 겨우 수리가 마무리되고 그 사건은 일단락됐다.
오수관 수리를 도와줬던 옆집은 수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이사 갈 집을 알아봤다. 이런 집주인과는 더 살 수 없다며 그로부터 1달 만에 이사를 가버렸다. 4월쯤 되자 슬슬 다른 세대의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시기가 왔다. 한 세대씩 이사를 갔고 집주인은 내심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나 역시 돈 대신 자기를 믿어달라는 집주인과는 더 살기 싫었다. 이번에는 다시 동대문구로 가고 싶었다. 아직 전세기간이 6달 정도 남았지만 틈날 때마다 부동산을 다니며 아내의 회사 근처로 집을 알아봤다. 그 바람이 이뤄졌을까? 그 해 5월 말 경, 뜻하지 않게 찾아간 부동산에서 좋은 집을 구했고 지금까지의 서울살이 중 가장 좋은 집주인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