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월 ~ 2021. 4월 별내동 00 아파트
아내는 완강했다. 마침 큰아이가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기가 힘드니 이번에는 기필코 집을 사서 이사한다고 말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올 수도 있고 아이끼리 집이 있냐 없냐에 따라 편이 나뉜다는 말을 했다. 머리가 아팠다. 집을 사게 되면 매달 갚아야 할 대출상환금은 어찌한단 말인가?
2007년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할 당시 내 담당구역은 남양주 및 서울 동부였다. 서울에 살던 나로서는 남양주로 나오면 주변에 산도 많고 길도 한가한 점이 맘에 들었다. 자산 증식을 위해선 입지가 좋은 아파트를 미리 사야 했는데 그때 난 너무 무지했다. 그저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 최고일 거라 생각했다. 한동안 아내도 여기저기 모델하우스를 보러 다닐 때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덥석 오남의 00 아파트를 계약했다. 결국 그 아파트엔 살아보지 못한 채 전세만 2번 주다 손해를 보고 팔게 됐다. 괜히 그 아파트를 사서 나중에 다산 지구의 아파트 청약 자격이 되지 않아 아내에게 두고두고 혼나기도 됐다. 아파트 입주가 시작될 즈음엔 내가 공무원 준비 중이라 매달 대출 상환하느라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고정금리로 대출받은 이율이 6.9%였다. 그래서인지 집을 산다고 하면 매번 힘들게 상환했던 2009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내를 이길 수 있는 남편은 없다. 결국 아내 손에 이끌려 아파트틀 알아보러 다녔다. 서울로 할까? 아님 경기로 빠질까? 서울이라면 지하철 역이 있는 곳이 좋은데, 입지가 좋은 곳은 터무니없는 가격대라 도저히 덤빌 수가 없었다. 동대문구 휘경동, 이문동 24평 아파트가 4억이 되지 않을 때였다. 집값은 매달 올라갔고 시간이 갈수록 얼른 집을 찾아 계약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게 됐다.
내가 구급대원으로 일해서 지리를 잘 아는 별내 쪽 아파트를 알아보자고 의견이 합쳐졌다. 우리가 최대한 끌어모을 수 있는 금액은 대출을 포함해 3억 5천만 원 정도였다.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주거공간으로 봐서였을까? 나이 41에 뒤늦게 집을 마련하려 아등바등 애쓰는 우리 부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별내 역시 아파트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별내역 근처와 별가람역이 지어질 곳은 이미 기대가 반영되어선지 5억이 넘어갔다. 어디로 가야 하나? 지도를 보던 중 별내와 청학리 경계 쪽의 부동산을 찾아갔다.
푸 0 아파트는 30평이 4억, 00 아파트는 34평이 3억 7천, 00 아파트는 28평이 3억 5천이었다. 4천만 원 정도만 더 있으면 초등학교 앞에 1000세대 대단지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었다. 예전부터 꼭 전세를 얻거나 집을 계약할 때도 꼭 그 정도 금액이 모자랐다. 이만큼만 더 있으면 한 단계 위로 계약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웠지만 구할 수 없는 돈이었다. 집만 둘러보고 돌아왔다. 세 집 모두 맘에 들었지만 섣불리 계약하자고 달려들 순 없었다. 일단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며 아내와 얘기를 했다.
아내 : 오늘 본 집 모두 맘에 든다, 00 아빠는 어땠어?
나 : 응, 나도 좋았어, 그런데 돈이 문제지
아내 : (속상해하며) 어디로 계약하면 좋을까? 우린 3억 5천이 한계잖아, 꼭 그러더라 3~4천만 더 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무 욕심부리는 것도 아닌데 (눈물을 글썽인다)
나 : 내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해 미안하다
아내 : 그런 건 아니고, 실은 우리 학교 선생님 있잖아. 얼마 전에 결혼했는데 시댁에서 왕십리에다 아파트 사줬다고 얘기하더라고, 명품 백도 들고 다니고, 조금 부럽더라고
나 : 못해줘서 미안하다
속이 상한 아내는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했다. 원래 아내는 수수한 성격에 요란하게 장식하는 걸 싫어했다. 난 아내의 그런 면이 좋았다. 실용적인 성격이라 명품 백에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명품을 선물로 요구한 적이 없어서 더욱 그렇게 여겼는데 아내도 여자였나 보다. 다만 돈이 많지 않으니 그저 욕구를 눌러 왔을 뿐이었다. 나도 검소하게, 소박하게 살아왔지만 이번엔 영끌해서 일단 집부터 사야겠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골랐다. 서류상으로는 28평이지만 실제로는 전용면적이 30평 정도 되어 보이는 3억 5천의 집을 계약하기로 결정했다. 큰 아이가 다닐 초등학교와는 250m 정도 거리였고 아내의 직장과도 운전해서 30분 정도 걸렸다. 어차피 난 남양주에서 일하고 있어서 크게 상관없었다. 그렇게 2017년 10월 진정한 아파트 입주민이 되었다.
18평 연립주택에서 28평 아파트로 오니 활짝 트인 거실이 맘에 들었다. 수납공간이 많아서 아이 물건을 놔두고도 공간이 남을 거라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아이들이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아이들 물건이 차지하는 공간이 늘어났다. 그러자 아내는 궁리 끝에 벽에 찬넬 선반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난 번거로운 일이 싫다. 그래서 집에서 가만히 쉬는 걸 좋아하지만 아내는 이렇게 뭔가 만드는 걸 좋아했다. 아내 생각엔 벽에 구멍을 뚫어 찬넬 기둥을 고정하고 선반을 다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여겼나 보다. 우리 집에 있는 드릴의 출력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벽에 찬넬 기둥을 고정할 만큼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 내가 3시간을 투자해 벽에 구멍을 뚫어 선반을 만들었지만 결국 올려놓은 물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둥을 고정하는 나사가 뽑혀버렸다. 어쩔 수 없이 전문가의 손길을 빌리기로 했다.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였다. 대용량 드릴로 벽을 뚫으니 10초면 구멍 1개가 생겼다. 다용도실과 드레스룸을 치우고 빈 벽에 찬넬 기둥이 차례로 벽에 붙었고 나무 선반을 올렸다. 각종 비품과 책을 그 위에 놓으니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 드레스룸은 아내의 서재 및 강의실로, 다용도실은 각종 먹거리 및 잡화 정리장으로 재탄생됐다.
아파트를 계약했을 땐 처음 듣는 건설사 브랜드라 조금 망설였는데 막상 살아보니 공간도 넓게 나오고 고품질의 내장재를 써서 이전 집들처럼 살면서 보일러나 창호, 단열 문제로 신경 쓸 일이 없는 게 좋았다. 그곳에서 사는 3년 동안 이런 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했고 이렇게 좋은 곳에서 내가 살아도 되는 걸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추운 겨울, 내리는 눈을 맞으며 아파트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는 내심 흐뭇했다. 매달 돌아오는 아파트 대출상환이 부담되긴 하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와 아이들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어 좋았다. 말 그대로 아늑한 집이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3년 3개월 만에 다시 이사를 했다. 왜냐고? 새로운 복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시작되어 아내는 드레스룸에서 강의를 하고 두 아이 모두가 재택수업을 하게 되니 공간이 부족해졌다. 새 집에서 사는 얘기는 조금 후에 다시 쓰겠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이 남아 있어서 그 일이 해결되면 새 글로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