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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ul 25. 2022

함박눈이 내리는 고속도로에서  10시간 버티기

2004년 3월 5일

신입사원인 나는 금요일 오전 7시까지 출근했다. 그날은 대전에서 충남, 전라도권 6개 지점 영업회의가 있는 날이라 7시 15분쯤 C0 광주지점 12명이 모두 모였다. 형들(그 당시 회사 문화는 선배님 대신 형이라고 불렀음)의 차 3대로 출발하기로 했다. 원래 막내인 나도 운전자 중 1명이어야 했지만 운전이 서툴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회사 형들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출발한 지 4~50분 지날 무렵 전주에서부터 눈이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점점 눈발이 굵어지더니 내가 보기에도 5cm 이상의 눈이 도로에 쌓였고 고속도로는 꽉 막힌 상태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나보다 7년 선배 00형의 차인 SM5를 타고 있었다. 형은 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운전하고 있었다. 대전까지 9시에 도착할 거란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무도 이후의 상황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오전 9시경

형 : 민 0아, 지금 몇 시냐? 우리 이러다 제시간에 대전 도착 못하겠다.

나 : 예? 지금 9시 다 돼갑니다. 제시간에 갈 수 있을까요?

형 : 별 수 있냐? 차가 안 가는데, 다른 사람들 연락해봐라, 어쨌는지?

나 : 네     

먼저 출발한 2대의 차량에 전화를 해봤다. 다른 형들 역시 정체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고 일단 계속해서 대전까지 가라는 답변을 들었다. 원래 회의 시작이 9시 30분이어서 대전에 9시쯤 도착하려고 했었는데 눈 때문에 길이 이렇게 막힐 줄은 몰랐다.  

    

오전 10시경

전주를 지나 얼마나 대전 방향으로 더 갔을까? 도로는 차들이 들어선 채로 꽉 막혀있었고 이젠 가다 서다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 멈춰만 있었다. 시간은 10시가 한참 지났다. 뒷자리에 앉은 범 0형이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는 말을 했다. 원래 유쾌한 성격인데 오늘따라 왠지 아무 말 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몸이 안 좋은 탓이었나 보다. 차에 탄지 벌써 3시간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고 담배도 피울 수 없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차는 거북이처럼 1m 갔다 3분은 멈춰 있었다. 앞으로는 가질 못했다. 어쩌다 20m 정도 정체가 풀릴 때도 있었는데 그땐 차들이 갑작스레 속도를 내는 바람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20톤 이상의 탱크로리가 급정거를 한 채 미끄러지며 하마터면 대형사고가 날 뻔한 걸 바로 옆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다행히 탱크로리 운전자의 실력이 뛰어났는지 사고가 나지 않고 운 좋게 앞 차량과 부딪히지 않고 멈췄다. 차에 탄 모두들 그 모습을 보며 차량 운전자 실력이 뛰어나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오후 1시경

뒤에 탄 범 0형이 점점 아파하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몸살 기운이 있다 했는데 차에는 상비약도, 물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목적지인 대전에 빨리 도착하기 만을 바랄 수 없었다. 설상가상 차에는 연료가 10리터만 남은 상태라 차가 멈췄을 땐 연료를 아끼려고 시동을 꺼놓았다. 눈이 내려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히터를 틀어놓을 수 없어 더 춥게 느껴졌다. 이젠 차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후 2~3시경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함박눈이다. 오전 8시쯤 눈 내리는 걸 봤는데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내린다. 참 끈질기다. 회의 취소를 알리는 전화가 왔다. 우리 말고도 서울에서 마케팅 팀이 내려오고 있는데 마케팅 팀 역시 엄청난 눈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차를 돌릴 수 없어서 그냥 대전까지 가기로 했다.     


오후 4시경

대전 도착 20km 전 지점까지 왔다. 다행히 우리 차엔 남자들만 타고 있어서 화장실은 용케 갓길에서 해결했다. 범 0형이 몸이 여전히 안 좋아서 대전에 도착하면 바로 병원 응급실로 가야 할 정도였다. 차에 기름이 5리터 정도 남았다. 이젠 차를 버려야 하나? 차 주인인 00형이 농담처럼 말하는데 왠지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오후 5시 넘어서

드디어 대전 톨게이트 7km 지점까지 도착했다. 연료가 떨어져서 시동을 끈 채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다들 차 문을 잠그더니 내려서 대전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내려서 걸어가기로 했다. 범 0형이 많이 힘들어했지만 옆에서 부축하며 걸어가기로 했다. 이것 외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오후 7시쯤

대전까지 걸어오자마자 범 0형은 병원으로, 나머지 일행은 바로 식당으로 갔다. 메뉴는 복국이었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상태에서 뜨끈한 국물을 들이켜니 그제야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렸다. 무사히 대전에 도착하자 하루 종일 긴장했던 마음도 사르르 녹았다. 역시 이 맛이야, 광고 카피가 저절로 나온다. 대전 지점에서 미리 잡아놓은 숙소에 들어가서 차례로 씻고 자리에 누웠다. 범 0형은 단순 몸살로 링거를 맞고 2시간쯤 뒤에 돌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속도로 공사에서 현장 판단을 잘못해 고속도로 진입을 막지 않아 차량 정체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소송을 제기해 4년 뒤 승소했다고 한다. 난 고생만 죽어라 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별의별 경험을 한 날이었다.     


기사 참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760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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