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희생된 유리 지바고는 불행한 개인이다. 동시에 혁명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지식인이다. 독자는 그로부터 소극적 주인공 이미지를 떨쳐낼 수 없다. 어떠한 대의를 읽을 수 없으며, 혁명에 대한 열정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인 스트렐리니코프가 시대를 이끌어갈 ‘이상적 혁명가’라 단정하는 것도 적당하지 않다. 한편 라라는 유토피아적 혁명을 꿈꾼다. 가장 이상에 가깝지만 안타깝게도 소설 속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과 고민은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결코 완결되지 않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학 평론가 미하일 바흐친이 규정한 ‘살아있는 인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자의식과 이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끊임없이 말하고 행동한다. 또한, 항상 잉여의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외적 정의로도 규정되지 않는다. 작가 파스테르나크도 마찬가지로 인물의 유형화를, 인간의 외면적 최종화를 지양한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 역시 바흐친의 이해와 다르지 않다. 결코 인물에 대한 완전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은 채, 그들이 처한 상황을 그저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므로 평가자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 독자의 몫이다.
이런 이유에서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를 통해 혁명 자체를 반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 단지 예술적 문제 제기의 일환이었다. 그는 시대를 살아가던 개인으로서 광기와 같은 혁명정신을 목격했다. 그리고 작가로서 그 폐해를 침묵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권과 타협한 혁명에 저항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르네상스 이후 발견한 인간 존재, 근대 문학과 함께 탄생한 ‘개인’에 대해 ‘인본주의’적으로 사유했던 결과물이 소설 <닥터 지바고>다. 당시 팽배하던 유럽식 유토피아는 획일적 이성을 숭배하는 합리주의나 계몽주의의 껍질을 썼다. 그 아래 숨어있던 전체주의는 변질된 소비에트의 혁명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그런 현실에 순응하는 대신 톨스토이의 후세대 작가로서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를 택한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인간 구원을 추구하며 그보다 더 정교하게 발전한 소설 형식과 철학을 통해 그 방법을 제시한다. 그가 묘사하는 개인의 몸부림에는 각자의 불완전함이 깃들어 있고, 때로는 그것이 모두 처절하게 느껴진다. 저마다 삶과 생존 방식은 각자 다르지만, 우리 역시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고 마는 존재로서 동질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등장인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근대적 개인의식의 발현이 전 유럽 국가를 통틀어 가장 뒤처졌던 국가였다. 유럽에도, 아시아에도 속하지 못한 채 흘러간 그 긴 시간 동안 자신들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나라다. 이에 모방과 융합을 통해 그들 만의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켰고, 오늘날에도 여전한 감동을 전하는 <닥터 지바고>는 그중 하나로 피어났다.
*르네상스 :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 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J. 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참고: <의사 지바고> 도서출판 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