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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May 13. 2023

눈 쌓인 운동장


겨울방학, 돌봄교실 건물은 바쁘다.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1층에 있던 돌봄 1반이 2층으로 이사했다. 1층은 부설 유치원을 운영하게 될 것이다. 이삿짐을 싸고 나르느라 난 허리를 너무 많이 숙였고 그 결과 디스크가 튀어나와 일주일 동안 침대에서 꼼짝도 못했다.


강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가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 학교에서 8년을 내리 일했다. 지금까지 돌봄교실이 적은 예산과 많은 학생수로도 잘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선생님이 그만큼 힘쓴 덕이었다. 강 선생님과 함께 부장 선생님도 전근가게 되었다. 그 많은 행정 업무에도 늘 다정한 분이셨던 부장 선생님까지 떠난다니 김 선생님은 근심이 가득했다.


연계형 교실이 눈치는 조금 보이지만 그래도 날 포함한 보조 선생님들까지 쓰면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던 건 사실 강 선생님의 유연함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티슈도 KF94마스크도 남는 공예도구들도, 연계형 교실의 자재는 대부분 돌봄교실의 여유분에서 얻어온 것이다. 나와 같은 보조 인력도 본래 연계형 교실은 쓸 수 없다. 김 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강 선생님이 근로생들을 보내주었기에 연계형 교실도 지난한 일 년을 무사히 헤쳐왔다. 물론 나 역시 다른 관리자가 온다면 똑같이 나를 근로생으로 뽑을 거란 보장이 없기에 내년에 계속 일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어른들이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동안 아이들은 새 학년으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1학년에서 2학년은 별 탈 없으면 돌봄교실을 그대로 다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4학년에서 5학년, 2학년에서 3학년은 꽤 차이가 난다. 돌봄교실에서 연계형 교실로, 연계형에서 어딘지 모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연계형은 원칙적으로 3-6학년까지 받을 수 있지만 저학년 우선순위이기 때문에 3-4학년이 채워지면 5학년부터는 거의 기회가 없다고 봐야한다. 이미 내년 연계형 교실 지원자는 정원의 2배수를 넘어갔다.  희수, 윤호, 주영이, 승혁이…2년간 연계형 교실을 다닌 아이들은 이제 공백을 채울 다른 곳을 향해 가야한다. 높은 확률로 학원이겠지. 

새해가 다가온다는 기대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학년들은 어딘가 붕 떠올라 있는 것이 전보다 부산스럽다. 이런 변화를 나만 느낀 건 아닌가 보다. 김 선생님도 한창 호통을 치다가 옆에 있던 나한테 말했다.


“겨울이 되면 아이들이 몸이 커서 너-무 힘들어. 전반적으로 애들이 이 시기에는 방방 뛰어, 막. 다리도 자라고, 몸도 자라고 하니까 그 느낌이 애들 안에 있어가지고, 제어가 안돼!”


몸이 자라면 그게 행동에도 영향을 끼치는구나.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계절에 따른 변화를 이미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아이들에 노련한 사람은 어쩐지 숙련된 개 조련사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들의 행동을 동물적으로 유추한다고 해야하나. 


전날 함박눈이 펑펑 내려 운동장에 눈이 가득쌓였다. 오늘 김 선생님은 공부를 일찍 끝내고 다 같이 운동장에서 노는 걸로 일정을 바꿨다. 아이들은 야무지게 장갑과 목도리를 하고 나섰다. 운동장의 반은 높다란 회색 철판으로 막혀있다. 체육관을 짓기위한 공사가 겨울 방학에 시작됐기 때문이다.


“선생님, 저렇게 막아버리면 우리는 어디서 놀아? 이제 놀지도 못해. 체육관 생기면.”


철판이 세워지는 걸 보면서 김 선생님은 말했었다. 체육관이 생기면 시설은 좋지만 사실 누군가 문을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으니 연계형 교실은 거의 이용하기 힘들 것이다. 학급 시간이 아니면 문은 닫혀 있을 테니까. 운동장은 공공 공간이지만 체육관은 그렇지 않았고, 그 운동장이 반절로 뚝 잘려 벽이 생겼으니 나로서도 아쉬운 일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운동장은 어느때나 들어가서 맘껏 놀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어떤 자격과 조건을 채워야 들어갈 수 있겠구나. 학교 시설 전반에 보기 좋은 시설이 세워지고 보이지 않는 기준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려나 아이들은 철판은 신경쓰지 않고 신나게 달렸다. 멀찍이 두세명이 모여 눈사람을 만드는가 하면 바로 눈을 뭉쳐 던지는 승혁이도 있었다. 눈덩이 세례를 받은 지우가 항복이라고 두 손을 번쩍 올렸다 승혁이가 뒤돌아 서자마자 바로 눈 뭉텅이를 던져버려서 난 깔깔 웃었다. 주영이는 한창 싸우다 내 곁으로 와서 잠깐 숨을 돌렸고, 수진이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현민이와 수진이는 옆에서 뭘 하던 눈사람 만들기에 집중했다. 희수는 맨 손으로도 열심히 눈을 굴려 승혁이에게 던졌다. 난 운동장 끄트머리에서 아이들이 뛰는 걸 지켜봤다. 김 선생님이 옆에 있었고 우리는 별 말 하지 않았다. 단지 선생님이 내게 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정들었지?”


김 선생님이 출근 초기 내게 했던 조언은 이렇게 실패했다. 아이들한테 정 주지마. 선생님. 하지만 김 선생님도 그 조언을 지키지 못했기에 지금도 여기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거겠지. 나 역시 저렇게 눈밭을 달린 적이 있지만 그 떄의 내가 이렇게 작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멀리서 보니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더 맑고 어리고 활기차구나. 일 년 가까이 너희들을 보아 왔어도, 너희는 너무나 낯설고 새롭고 불가해한 힘으로 가득 차 있구나. 희수는 기말 영어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왔다. 난 그 애가 일 년 사이 어떻게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윤호는 변성기가 시작됐고 한층 점잖아 졌다. 나도 속으로 아끼는 아이가 있는 것처럼 김 선생님의 남모를 애정도 윤호에게 기울어 있는 걸 안다. 


이 교실을 떠나면 아이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김 선생님이 이들에게 전해 주고자 했던 안정감을, 그 곳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 겨울 햇빛이 회색 철판을 지나 아이들이 달리는 눈밭 위로 하얗게 쏟아졌다. 눈이 부셔 인상을 찌푸리면서 난 생각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게 될까. 눈밭을 뒹굴던 이 날의 기억은 아이들의 기억에 남을까, 아니면 물처럼 사라지게 될까? 어떻게 되건 아이들 기억 속에 멀리서 자신들을 바라보던 곱슬머리의 젊은 선생님은 없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도 친구들과 놀던 나는 있어도 나를 말없이 돌봐줬던 누군가는 빠르게 사라졌으니까. 돌봄은 이렇게 잊혀지면서도 그 속에 남아 다시 누군가에게로 이어지는 일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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