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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Oct 25. 2024

내가 하는 일

살림의 수고로움

A씨를 직장에 바래다주고 올 때는 종종걸음으로 뛰어온다. 9시에 A씨의 출근을 끝내고, 9시 반에 B씨의 집에 시간 맞춰 출근하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도착하면 B씨의 남동생이 문을 열어주고 재빠르게 바우처 카드를 내 휴대폰에 찍는다. 휴대폰 카드 인식기(NPC)에 카드가 인식되면 출근 시작이다. 몇 분이라도 늦으면 시급이 깎이기 때문에 내 관심사는 무엇보다 바우처 카드다. 카드 인식은 매우 자주 늦어지고 오 분이 넘게 핸드폰과 씨름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오 분때문에 시급 30분이 사라지기도 한다. 초조하고 화가 난다. A씨를 마중가려면 시간을 딱 맞춰 나가야 하는데 퇴근할 때 연결 문제가 생기면 정말로 욕지기가 나온다. 카드 입력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어째서 실시간 결제를 하지 못했는지, 소급결제 서류를 적어 센터에 제출해야 한다. 


지난 번에도 연결 문제로 거진 십 분이 되도록 카드 인식이 되지 않았고, 시간에 쫓겨 일단 B씨의 집을 나왔다. 센터에 소급결제 서류를 내러 갔더니 미결제 사유를 적으라 하기에 코디네이터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었다.

-활동지원사 과실로 실시간 결제하지 못함. 

퇴근하고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센터를 굳이 와야하는데 짜증이 나 있던 나는 미결제 사유를 적으면서 한번 더 화가 났다. 내가 실시간 결제를 하지 못한 건 지원사 과실보다는 시시때때로 네트워크 오류가 나고 로딩하다 종료되어 버리는 어플 문제인데 왜 내 탓으로 적으라는 것인지. 이 모든 게 활동지원 일에 딸린 부수적인 스트레스들이었다. 촉박한 이동시간, 출퇴근 시간 입력에 대한 압박, 그때그때 달라지는 일정,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 할 수도 없지만(그는 늘 바빠서 미리 예약 시간을 잡아야 한다) 매달 근무 외 시간에 센터 앞 우체통에 서류를 직접 넣고 와야 하는 번거로움. 


서둘러 B씨의 집에 도착하니 B씨는 잠들어 있었다. 남동생 말로는 오후 두세시가 되도록 자는 게 일상이라고 한다. 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으면 열 시 반, 열한 시쯤 부스스 일어난다. 방이 상당히 엉망이었지만 내가 매일 가서 정리하니 많이 깔끔해졌다. 집에서도 이렇게 부지런히 집안일 한 적이 없는데. 옷을 개고, 바닥을 쓸고 닦고, 물건을 치우고, B씨가 일어나면 드실 밥을 준비해놓고. 엄마가 하던 일. 할머니가 하던 일. 같은 집안일인데도, 자취하는 내 집에서 청소를 하고 물건을 치우는 것과 B씨의 집에서 밥을 차리고 정리를 하는 건 느낌이 다르다. 내 생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정리와 누군가를 위해 하는 살림의 차이일까. 내 집에서 나는 보통 누워 있고 요리는 배달시켜 먹으며 미루고 미루다 청소를 한다. 내 물건들은 굳이 애써 돌보고 살려야 할 필요가 없다. 


엄마도 할머니도 내가 어릴 때 그렇게 집을 열심히 쓸고 닦은 건 혼자 사는 집 아니라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더 많은 공을 들여 살림을 했던 게 아닐까? 그 방법은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그냥 계속 하면서 눈대중으로 배워나간걸까? 나는 집안일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지만 누군가는 계속 하고있을 집안일을 생각하니 아득했다. 그들도 처음부터 알았을리 없고, 이런 과정 속에서 배워간 것이겠구나. 이 세상의 청결과 생활과 정돈은 조용히 만들어진 살림꾼들로 유지되고 있었구나!

엄마와 집안일의 기술은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왜 새삼 놀라운지. 그리고 이상한 인생 경로를 따라 나 역시 시간 당 11000원을 대가로 이 조용한 기술을 연마하는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숙련된 가사 노동자들이 본다면(특히 B씨의 어머니가 내 바닥 쓸기를 본다면) 내 집안일은 성에 안 찰 것이다. 많이 늘긴 했지만 나는 각 맞춰 빨래 접기, 먼지를 깔끔하게 처리하기 등에 여전히 서툴다. 이 살림꾼들이 어디선가 날 관찰할 것이란 생각에 ‘하지만 전 이런 일은 할 줄 모르는 걸요!’ 라고 혼자 속으로 외치면서 산더미같이 쌓인 B씨의 옷을 갰다. 슬쩍 눈을 뜬 B씨는 내가 옆에 앉아 빨래 개는 걸 빤히 보더니 미소를 짓고 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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