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어느 날
장애인 단체의 시위로 전철이 연착됐다는 안내가 매일 아침 나온다. 내가 교육을 들을 때도 한창이던 이동권 투쟁이 계속되고 있구나. 오늘도 전철은 연착됐다. 두어 대 정도 지연됐을까.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 뉴스창에서 올라온 애꿎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식의 발언이 계속 생각났다. 안내 방송을 들으며 A씨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다. A씨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전철이 두어 번 지나가고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사라졌을 때 쯤 A씨와 전철을 탔다. 늘 그렇듯 엘리베이터를 찾아 먼 길을 간 뒤 앉았다 걷다를 반복하며 회사에 도착했다.
전철이 늘 오던 시간에 오지 않아서, 출근길 사람들은 다들 짜증나 보였고, 아주 급해보여서 우리도 당연히 지각할 줄 알았다. 도착하니 9시 몇 분 전이었다. 평소보다 빨리 걷지도 않았는데, 전혀 지각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 누군가의 시간은 지연되고 그래서 계획이 흐트러지고 방해를 받았겠지만, A씨는 아니었다. A씨는 자신의 속도에 맞지 않는 대중교통에 맞춰 아주 일찍 출발한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전철은 당연히 내가 원하는 시간에 오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도 내가 편한 곳에 있지 않으며 내 다리도 내 마음처럼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불리함의 대책으로 A씨는 이미 비장애인의 속도보다 세 배 더 어림잡아 자신의 경로를 만들었고, 여러 돌발 상황에도 굳건히 잘 버텼다.
그렇다면 짜증에 휩싸인 이 많은 사람들이 A씨처럼 진작에 한참 일찍 나왔으면 되었을 것을, 이라는 심술맞은 생각을 했다. 전철이, 여러 사회 인프라가 늘 약속한 시간에 약속대로 내 앞에 제공될 거라는 기대는 한번쯤 꺾여도 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A씨와 떨어져 다른 곳으로 출근한다면, 네이버 지도에서 보여주는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출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세계에서 전철은 대부분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고 계단을 지나 빠르게 걸어가면 내가 예상한 시간에 예상한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그렇게 아낀 시간에 나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나를 위한 일. 아니면 그냥 쉬는 일. 내가 괜히 A씨 옆에서 바쁜 직장인들에게 심술을 부리는 건, A씨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 활동지원사인 나는 A씨의 옆을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닌 척 했다. 누가 내 옆에 있느냐에 따라, 내가 누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A씨와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잠깐 다른 세계에 있다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건 더 길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신속한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우리는 나중에 타는 데 익숙해지는 세계였다. 내 속도에서는 지루했고, 일단 심술이 났다. 사람들이 쳐다보아서, 엘리베이터가, 에스컬레이터가 너무 자주 고장나서(그리고 오래 고쳐지지 않아서), 그냥 세상이 너무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서, 관심이 없는데 쫓아가려고 애쓰는 기분이 들어서 온갖 것들로 출근길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특히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한창일 때는 더욱 그랬다. 어쩐지 그런 날에는 A씨의 눈치를 더 살피게 됐고, 왜 단순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A씨가 은근히 이러한 시위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A씨의 관심 여부와 상관없이 내 삶도, A씨의 삶도 이런 시위가 만들어내는 반향 속에 있었고, 그 온갖 얽힘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졌다.
물론 내가 출근길에 이런 불만과 고뇌에 차는 동안 A씨는 무심했다. 쳐다보거나 말 거는 사람을 상대하지 말기. 친절하지 말기. 그걸 어기지 않는 한 A씨는 평온한 얼굴로 안내견처럼 따라다니는 나를 내버려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