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은 Oct 25. 2024

그렇고 그런 사이

할머니와 손녀

B씨를 보면 심란하다. 남편이 돌아가시고 난 뒤 방에만 앉아 있는다는 B씨의 위생은 좋지 않았다. 일단 무좀을 방치한 탓에 발이 많이 상했고, 발가락은 양말을 뚫고 나올만큼 길었다. 사례관리사가 제일 먼저 부탁한 것도 발가락 치료와 최대한 자주 씻겨드리기였다. B씨는 첫 주에는 나와 같이 인근 교회로 산책도 나가고 양치도 세수도 곧잘 하셨다. 아홉시 반에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일어나 앉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매일 온다는 걸 알자 새로움이 사라졌는지, B씨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도 일어나지 않았다. 은근슬쩍 방 불을 켜도 고개만 돌릴 뿐 굳건히 잠에 들어 열한 시 쯤에야 일어났다. 그 때 식사하고 이부자리 정리하면 금세 퇴근할 시간이다. 씻길 시간이 없다. 목욕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세수, 운 좋으면 양치, 기분이 아주 좋으면  개수대에서 머리 감기까지 십 분이면 전부 끝낼 수 있다. 문제는 B씨가 전혀 씻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B씨가 식사를 다하고 설거지를 할 때 세수도 할 수 있게 잘 설득해야 한다. 양치부터는 난이도가 높아진다. 

“새 치약 있는데, 우리 양치 한 번만 할까요?”

“안 해!”

“한 번만요! 일 분만~”

“안 해!”

“양치하고 사탕 하나 먹읍시다. 일주일만에 양치 한 번만 해요~”

“안 해!!!!!!”


이쯤 되면 B씨가 손을 홱 내저으면서 돌아앉아 버리기 때문에 나는 더 말 걸지 않고 가만히 주변 정리만 한다. 텔레비전으로 B씨가 좋아하는 를 틀어놓는다거나. 운이 좋은 날에는 삼십 분 정도 있다가 B씨가 갑자기 “하자!” 하면서 일어날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덩실덩실 춤을 추다시피 하며 개수대로 B씨를 안내해 30초만에 끝나는 양치를 응원한다. 박수도 치고, 환호도 하고. 온갖 재롱을 떤다. 

운이 좋지 않은 날은 양치도 세수도, 머리 감기도 하지 않은 채 세 시간이 끝난다. 세 시간 내내 화가 난 B씨와 어떻게든 씻기를 시키고 싶은 내 눈치보기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일이 틀어지면 B씨는 화가 많이 나고 나도 짜증이 난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아주 작은 일이고 B씨가 씻고 나면 주려고 좋아하는 간식도 내가 사 왔는데.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내 일도 아니니까.” 라고 말하고 나도 돌아앉고 싶다. 나 좋자고 하는 일도 아니고, 다 B씨 당신의 삶의 질을 위한 것인데! 불만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그리고 교육 받을 당시 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기억하세요, 여러분. 활동지원은 돌봄 노동이 아니에요. 활동 지원사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지 돌봄을 하는 게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돼요. 기억하세요, 지원사 일을 할 때 여러분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요. 무조건 이용인의 욕구와 지시를 그대로 수용해서 서비스하시면 됩니다. 


그 말이 맞다면 나는 B씨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된다. 그가 치료와 청결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존중해서 서비스하면 된다. 하지만 그건 방치와 비슷한 게 아닌가? 발달장애인 활동지원의 복잡한 점은 이용인의 욕구 충족이 이용인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니며, 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원하는 게 그에게 필요한 게 아닐 수 있다. 활동지원사는 이용인에게 필요한 게 뭔지 미리 생각해 적절히 통제하고 설득하고 행동을 바꾸도록 유도해야 한다. 짜증과 반박을 감수하면서도 이용인에게 최선인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게 돌봄 노동이 아니라면 뭘까? 왜 강사들은 우리에게 활동지원사는 돌봄 노동자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 것일까? 장애인이 돌봄이라는 명목의 과도한 통제에 시달린 역사가 길고, 아직도 너무 쉽게 선택권이 박탈 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활동지원을 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돌봄 노동으로 생각하면, 더 복잡하고 윤리적인 책임이 뒤따른다. 인지 능력에서 내가 B씨보다 취약하지 않다는 건, 그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어가기가 더 용이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를 속일 수도 있고, 무언가 숨길 수도 있고, 잠든 B씨를 계속 잠든 채 내버려 둘 수도 있다. 그는 본인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모르고 나는 귀찮고 피곤하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 조절에 지치고 소통 불화에 지치고 내가 잘한다고 딱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집안일도 끝나고, B씨는 여전히 잠들어 있을 때면 오늘은 그냥 편하게 지나가볼까 생각한 적도 많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지. 나는 그러라고 여기 온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건 나와의 싸움이다. 짜증내고 싶은 나, 내버려 두고 싶은 나를 이겨내고 더 책임감 있는 내가 되는 일! 내가 느끼는 윤리적 책임감에 얼마나 잘 응답하느냐의 문제다. 

누군가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착한 행동은 당연하지 않으며 나는 여러모로 자잘한 도덕적 해이를 저지르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도 B씨의 옆에서 나는 더 유연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돌보는 일을 잘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일을 잘하고 싶었고, 그러러면 인간적으로 지금까지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순간 B씨의 청결을 고집하는 내 태도가 세 시간 동안의 내 쓸모를 증명하고 싶은 욕심에서 나왔다는 걸 깨닫고 적당히 내려놓았다. B씨가 내 말을 따라 양치를 하거나 산책을 나가면 내 효용이 증명된 것 같아 일부러 더 떼를 쓴 것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집안일과 달리 이런 행동은 사례관리사에게 내가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 보여주기도 쉽다. (“이번 주에는 (제 덕분에) 세 번이나 이를 닦으셨어요!”)

생각해보면 이 행동들이 모든 감정 싸움과 B씨의 분노를 감내할 만큼 대단한 일인 것도 아니다. 

더러우면 어떤가, 조금 아프면 어떤가. 본인이 만족한다면야. B씨는 그닥 깨끗해지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익숙해지고 있었다. 

B씨가 웃으면서 날 반겨주고 웃으면서 날 보내주면 하루를 잘 보냈다고 생각하자. 


좋은 날은 냉장고에 밥 말고도 먹을 게 있는 날이다. 누가 주고 갔는지 사과가 하나 있어서 B씨에게 깎아 주었다. B씨의 이가 안 좋아 작게 잘라 주었다.

“맛있어요?”

“네.”

텔레비전에는 의 고부 갈등이 나오고, B씨가 사과를 맛있게 씹는 소리가 들리는 평화로운 시간. 

“먹어.”

B씨가 내게도 하나 건네주었다. 이럴 때 B씨는 손녀에게 과자를 건네주는 할머니같다. 우리가 밖에 나가 손을 잡고 걸으면 사람들이 할머니와 손녀 사이로 보기는 하지. 

이렇게 별 탈 없이 흘러가는 날이면, 나는 일과 책임감과 온갖 잡생각을 내려두고 그냥 우리가 할머니와 손녀인, 그런 사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

이전 06화 내가 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