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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Jan 24. 2022

여덟 살과의 보드 게임

아으아!





 2020년, 돌봄 교실에는 서너 명의 아이들만 있었다. 코로나가 두렵고 낯설기만 했던 그 해 초에 꽉 찬 돌봄교실 명단 속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최대한 집에서 돌보려 했다.

 

난 마스크가 답답하고 심심한 서너명의 아이들과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학년 아이들과의 일대일 게임은 규칙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아이들마다 제 기억(혹은 입맛)대로 규칙을 만들어서 내게 알려준다.


예를 들어, 수빈이는 스머프 주사위 게임에 자기만의 규칙이 있다. 스머프 주사위 게임은 주사위를 굴린 숫자대로 한 칸씩 움직인다. (설명서에 따르면) 먼저 100번째 칸에 도착하는 사람이 이긴다.


내가 먼저 100번째 칸에 도착하자 수빈이가 다급하게 말한다. 


“이건 아직 안 끝났어요. 이 뒤에 있는 스머프 다 밟고 나무까지 먼저 가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100번째 칸 뒤에는 스머프들이 줄줄이 나무 앞에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있다. 


“정말?”


 내가 묻자 수빈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지. 나는 다시 주사위를 돌린다. 내가 먼저 나무에 도착했다.


“나무까지 갔다가 다시 100번째 칸에 먼저 돌아오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아깐 나무까지 먼저 가는 사람이 이긴다며!” 


“아녜요.”


“알았어.”


행운이 따랐는지 나는 쭉쭉 앞으로 나갔다. 세 칸, 네 칸, 두 칸…


“선생님이 이겼다.”

“아으아!”


수빈이가 탄식을 뱉으며 매트 위에 엎어진다. 규칙이 엿가락 바꿔먹듯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나름의 논리도 있고 더는 방법이 없을 때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으므로 수빈이의 경우는 귀여운 편이다. 


일학년 아이들과의 보드게임은 종종 매우 치사해질 수도 있다. 오동통한 팔과 볼록한 이마가 짱구를 닮은 동현이의 경우를 보자.


동현이는 요즘 바둑판 위에서 하는 알까기에 한창 빠져있다. 가장 좋은 상대는 나다. 우리는 딱딱한 바둑판 위에 흑돌 백돌을 여러 개 올려놓고 알까기를 시작한다.


지금 나는 흑돌, 동현이는 백돌이다. 


“선생님은 알까기를 잘 못 하니까 저보다 네 개 더 놓으세요.” 동현이가 선심을 쓴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난 흑돌 네 개를 바둑판 위에 더 놓으면서 눈꼬리를 올린다. 내가 여덟 살 아이보다 알까기를 못한다니! 이번엔 이기고 말리라. 지금까지 나는 동현이에게서 5승 6패정도의 승률만 얻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요즘 일학년의 알까기 규칙은 아주 성가시다.


“아이, 아니, 아니죠. 선생님, 손 이렇게 옆으로 해서 치는 건 반칙이에요.”


옆으로 치는 것도 반칙이고, 손 끝으로 치는 것도 반칙이고, 손을 반만 기울여서 치는 것도 반칙이고 몸을 너무 숙이는 것도 반칙(동현: 선생님은 저보다 몸이 크잖아요!), 아무튼 반칙이 엄청 많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러, 이렇게.” 동현이 작고 오동통한 손가락을 열심히 비틀어 어떤 손 모양을 만드는데 난 내가 하는 손 모양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옆으로 안 했어. 선생님 손이 크니까 바둑판에 닿는 것처럼 보인 거야.” 나는 비굴함을 무릅쓰고 항의했지만 동현이는 가차없다.


“반칙했으니까 제 차례에요.” 동현이가 백돌을 친다. 내 흑돌이 날아간다. 나는 시험 문제 찍을 때의 집중력을 발휘해 최대한 섬세하고 정확하게 흑돌을 친다.


백돌이 두 개 날아가고, 흑돌이 한 개 날아가고, 백돌이 한 개 더 날아갔다가 되돌아오고, (아아! 선생님 또 반칙했으니까 무효!), 조막막한 애기손과 둔탁한 어른 손의 치열한 싸움. 이제 바둑판 위에는 백돌 한 개, 흑돌 세 개가 남았다. 나의 승리다! 나는 마스크 속으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여유롭게 몸을 뒤로 눕히기도 한다.


동현이는 자신이 질 것 같자 작은 눈썹을 찡그렸다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날 보더니 갑자기 눈을 둥글게 접으면서 웃는다. 볼살이 마스크 위로 한껏 올라온다. 마스크 속에서 나처럼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게 틀림없다. 


동현이는 간을 보는 것처럼 손을 하나 남은 백돌 위에서 까딱 거리더니 내게 묻는다.


“선생님, 이거 알아요?”


“뭔데?”


“허리케인 박치기!!!”


동현이가 갑자기 손바닥을 활짝 피고는 몸을 날려서 바둑판 위의 돌을 후려쳐 죄다 날려버린다. 사방으로 돌들이 튄다. 


“으아악!”


“제가 이겼어요!”


동현이의 말에 난 탄식을 내뱉으며 매트 위로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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