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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Mar 23. 2023

아이들은 말한다

도시락


아이들은 아무 이야기나 다 한다. 어른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시간, 어제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간식시간. 민규는 엄마가 싸준 썬칩 과자를 먹고 있다.

“선생님, 어제 저희 엄마가 밤 한 시에 들어왔는데요. 제가 자는데 깼어요.”

“응. 그랬어.”

“엄마가 술 먹어서 화장실에 누워서 토 엄청 했어요.”

“그랬구나.”

“거실 바닥에 토해서 아빠가 닦았어요.”

“어른들은 가끔 그럴 때가 있어...”


목청 큰 민규는 2층 전통 놀이 프로그램 선생님한테도 그 말을 하고 돌봄 2,3반에 가서도 그 말을 했다. 그래서 민규의 어머니가 전날 술은 많이 먹고 왕창 토했다는 사실은 널리 퍼져간다.


민규처럼 도란도란 이야기하기보다 공연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다. 태훈이는 친구들과 엄마 아빠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교실 맨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가 연극을 한다.


엄마: 당신 또 새벽까지 게임하느라 컵라면이나 먹고 하나도 치우지 않았지! 집안 꼴 좀 봐!

아빠: 아씨, 또 게임갖고 난리야. 니가 알아서 해! @#$% (물건을 집어던진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의 연극이다. 태훈이는 모두의 관심을 누리며 실감나게 연기한다. 쉬는시간이라 선생님도 굳이 말리지 않는다. 그렇구나. 태훈이의 아빠는 게임을 밤새 하고 엄마는 그게 싫어서 자주 싸우는 구나.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쨋거나 알게되는 각자 집안의 속사정.


자매가 같이 돌봄교실에 다니는 수진이와 희연이. 수진이는 3학년이고 희연이는 1학년이다. 그림체는 비슷하지만 성격은 전혀 다르다. 수진이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해하는 편이라면, 희연이는 늘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하는 아이다. 분홍 머리띠를 늘 쓰고다니는 희연이는 영리한 말티즈같다. 수진이는 마음이 여리고,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선생님인 나와 자주 논다. 수진이는 방황하는 바둑 강아지같다. 여러모로 마음이 쓰이는.

할머니, 아버지와 같이 사는 수진이와 희연이는 자매가 으레 그렇듯 사이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데 왔다갔다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희연이를 더 좋아하고 할머니는 반대로 수진이를 더 감싸도 도는, 복잡한 알력다툼이 있는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수진과 희연이 사이는 애증


희연이가 오종종 내 책상으로 와서 말한다.

“선생님, 어제 언니가 제 뺨 때렸어요.”

음. 그건 너무했지. 희연이가 작은 손으로 제 얼굴에 시범도 보인다. 난 깜짝 놀라서 희연이 볼을 붙잡았다. 

오후에 방과후 연계형으로 가면 수진이가 말한다.

“선생님, 전 이희연 걔가 제일 싫어요.”

그러면서 희연이가 수진이를 고자질한 걸 하나하나 설명한다. 이 역시 화날법 하다.

선생님의 덕목은 무엇보다 중용이므로 난 둘 다에게 뜨뜻미지근한 위로를 건넨다. 그래놓고 둘은 집에 갈 때 늘 같이 간다. 자매란 무엇일까. 뺨도 때리고 뒤통수도 치면서 크는 거겠지. 


오늘도 분홍 반짝이 머리띠의 희연이가 오종종 내게 온다.

“선생님”

“왜?”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나요?”

아니. 희연이가 내가 매일 술을 먹는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난 괜히 찔려서 대답을 얼버무렸다.

“음, 기분이 좋아지지..? 어른들은 그래서 먹지..보통?”

“저희 아빠는 매일 밤마다 술 먹어요. 엄청.”

“음.”

“그래서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나 궁금해요.”

“술은 어른들이 먹는거야.”

희연이의 눈은 언젠가 술을 먹어보고 말겠다는 야망으로 반짝거렸다. 난 그 똘망한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의 점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방학이라 다들 도시락을 싸 와야 한다. 코로나로 급식은 하지 않는다. 과일과 밥을 싸오는 아이들도 있고 과자에 주스를 가지고 오는 아이들도 있다. 매일 도시락을 싸야한다니. 도시락 메뉴를 보면 학부모들의 노고가 보인다. 


희연이 아버지에게 전화가 온다. 희연이가 도시락을 놓고 갔으니 가져다 주시겠단다. 나는 알겠다 대답한 뒤 언제쯤 그가 오시려나 궁금해한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돌봄교실 시간표에서 교실 밖을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도시락이 없어 희연이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진다. 난 희연이에게 아버지가 오신다고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교실 문만 쳐다보게 될 테니까. 도시락을 누가 가져다줄 거라고만 했다. 


아이들이 점심 시간 전 손을 씻을 시간. 난 복도를 확인하기 위해 교실 문을 열고 나왔다. 신발장 위에 무언가 있다. 플라스틱 봉지에 든 분홍색 작은 도시락과 삶은 달걀 두 개. 도시락 뚜껑 위에 네임펜으로 굵게 쓰여있다. 

‘이희연 사랑해’


언제 왔다 갔는지도 모르게 도시락만 두고 슬쩍 떠나시다니. 희연이가 종이 인형 만드는 건 보셨을라나. 난 큼직하게 휘어진 어른의 글씨를 보면서 괜히 뭉클해졌다. 


술도 먹고 토도 하고 못난 모습 보여가면서, 어른들도 각자 최선을 다해 아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겠지. 늘 성공하지는 않을 그 시도 속에서, 난 그냥 희연이가 아빠의 이 글씨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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