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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Feb 13. 2024

아프지만 소소하게 살아가봐요

연을 끊기로 했다.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매년 새해가 되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안부인사다.

자주들르는 카페를 가니 사장님께서 "새해 많이받으세요"라고 하시며 커피를 건내주셨다.

커피를 받으며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하며 가게를 나왔다.

'새해 복이라...아쉽게도 올해는 새해 복을 많이받지못했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새해 복을 많이받으라는 말을 내뱉는 자신이 언밸런스하다.


내 생일은 항상 설 연휴에 껴있는 편이라, 안부인사가 많이오는 편에 속해서 항상 설인사와 생일축하메세지가 겹쳐오는 편이다. 올 설은 설당일과 생일날이 겹쳐서 많은연락이 오던중 엄마에게 전화가 와서 받았다.

받자마자 전화기너머로 쩌렁쩌렁하게"너는 어떻게 된게 엄마가 먼저연락을 해야되니? 전화는 왜안받아? 어떻게 된 게 전화를 하면 허구헌날 연락을 못받는다는 말밖에 안들리니? 너한테 전화를 할 때마다 이렇게 짜증을 내야 정신을 차리니? 뭐 설이면 당연히 전화하고 와야하는거아니니? 개키운다고 개만끼고사니?" 등의 말이 수화기너머로 다다다닥 들려왔다. 아침 10시 간만의 휴일에, 설 이전의 생일인날 일어나자마자 받는 전화가 언성을 잔뜩 높여 화내는 전화라니 하루시작부터 꼬인느낌이 들었다. 피곤하고 기분이 나쁜상태에서 듣고있다가 일방적으로 "내일 당장 밥이나 한끼하자 가족끼리 모여서, 어디어디로 몇시까지 와!"하고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기록을 보며 가야될지, 말아야할지 고민을 하루종일 했다. 독립을 하면서, 집안의 일이 점점생길때마다 가족이라는 단어에 무게추를 더한마냥 점점 무거워지기시작하더니 어느새 생각만해도 숨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꼭 만나야할까'라는 생각을 꼬박 하루동안하다 다음 날이 다가와서 약속장소로 향했다.


사람의 뇌란 복잡하고도 단순해서, 좋은 것보단 나쁜 것을 더 오래기억하고 강렬히기억한다.

나에게 우리가족은 '허우대만 멀쩡한 척 하는, 쓰러지지않되 쓰러지기직전의 집'같이 보여진다.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부정적인 가족에 대한 기억은 엄마, 아빠가 싸우다 지친 엄마가 와서 "ㅇㅇ는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누구랑 살래? 아니면 죽을까?"였다. 어릴 때 뭣모르고 내가 여기서 둘중하나만 고르면 엄마아빠가 없어진다는 공포심에 그러지말라고 울었었다. 8살이 되기전까지 자주 이혼에 대한 말씀을 하셨으며, 너네때문에 이혼못한다. 라고 말하는 불행해보이는 모습의 엄마가 불쌍해서 엄마 그러지마, 슬퍼하지마, 내가 잘할게를 자주말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유치원을 진학할 시기 쯤 부터 ㅇㅇ이가 오빠 챙겨줘야돼, 동생이니까 누가 오빠괴롭히면 혼내고, 엄마아빠없어도 지켜줘야돼, 오빠는 아파서, 오빠는 약해서 등의말으로 왜그런지, 왜그래야하는지도 모르는 체 내가 지켜야되는 존재, 이렇게하면 엄마가 좋아하겠지? 덜힘들지도 몰라 라며 항상 오빠랑 붙어다녔던 기억이난다. 어릴때의 기억은 별로 없다. 그냥 엄마는 항상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모습, 나어떻게 살아야해?라며 한탄하시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진학할때쯤부터 오빠를 확실히 더 예뻐한다라고 생각하여 왜 오빠만 예뻐하냐고, 왜 오빠만 공부안시키냐고, 나도 놀고싶다 라며 엄마에게 때를 부리자 "너까지 왜그래, 엄마 너무힘들어, ㅇㅇ이는 혼자할 수 있잖아."라며 그때까지도 오빠에 대해 왜그렇게 감싸는지 말도 안해주며 이해를 강요받았다. 오빠는 그럴때마다 약올렸고, 내가 보기엔 하나도 안아프고 멀쩡하고 잘노는데 왜 나만 이래야되냐며 화를 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너는 왜이렇게 이기적이니"였다.


그러다 중학교를 서로 각기 다른 여중,남중으로 배정되면서 갈라지게 되며 엄마는 오빠에게 더더욱 신경쓰기 시작하였으며, 그때쯤 왜 그러시는지 말을 해주셨다. 오빠는 사실 경미한 지적장애가 있어서, 의사소통등 일상적인 부분에선 문제가 없었으나, 사회성을 쌓기전이었던 학생시절엔 신경을 써야해서 그랬던거다. "그러니엄마한텐 오빠가 아픈손가락이니 멀쩡한 너가 이해를 좀 해줘, 챙겨주고, 나중에 엄마가 못챙겨주는상황이 오더라도 너가 꼭 옆에서 챙겨줘야해. 너라도 제대로 살려면 열심히 해야해" 라며 본인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오셨는지, 얼마나 힘든지, 너라도 챙겨줘야된다 라며 본인연민을 하시며 나를 이해시키려고하셨다. 그때도 엄마는 힘들어하셨기에 내가 잘해야 엄마가 안속상하겠다 라는 생각과,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니 왜 엄마의 몫을 나에게 강요하지? 같은 생각이 충돌하며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를 못하여 중학교 졸업날 결국 내 졸업식에 아무도 안와 많이 속상해했던게 기억이 난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같은학교로 서로 가서 다행이다 니가 꼭 챙겨줘, 수시로 오빠 반 찾아가서 뭐하는지 봐봐, 학교에서 어떤일이 있는지 꼭말해줘야돼, 등의 말을 꾸준히 하시며 진로에 대해 정석적인 안정적인 직업을 강요하셨다. 진로에 대해 얘기가 나오면서 점점 부모님이 나에게 바라는 이상을 강압적으로 들이대어 싸우는 빈도수가 늘어나서 날마다 내가 왜그래야하냐며 바락바락하자 "너는 왜이렇게 애가 드세니, 왜이렇게 성격이 예민하니? 엄마말에 그냥 예 하면 어디덧나니? 너 이상한애다 정말."하며 뜻을 찍어누르려하셨다.


나는 어릴때부터 미술쪽으로 진학하고싶어해서 미술을 하겠다며 미술학원을 보내달라고 말씀을 드리며 진지하게 미술쪽으로 진학하고싶은 의사를 밝히자 그때 당시 그림을 그리던 연습장을 뺏어 갈갈이 찢으며 니가 무슨 미술이냐, 미술같은 헛소리 하지말고 공부나하라며 뺨을 맞으면서 오빠는 아픈손가락이어도 다하게해주면서 진로하나 내가 선택을 못하냐며, 뜻을 굽히지 않으니 대신 그때당시 가능했던 특성화고 특례 공무원시험준비를 하며 학원을 주말만 다녀라. 그러면 허락해주겠다. 라는 말에 원래 주중까지 다니는 학원이지만 주말이라도 다니는게 어딘가싶어 공무원시험은 공무원시험대로, 학원은 학원대로 다녔었다.


비록 다른애들에 비해 뒤늦게 학원을 다니고, 늦었다고해도, 실력이 부족해서 쫓아갈 실력임에도 미술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이 났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하고싶은 꿈을 그래도 응원해주시구나 라며 주말만 바라보며 신나했었다. 그러다 뜻하지않게 해당 해에 정부가 바뀌어 학교에서 실행하던 공무원반은 엎어져 입시미술에 집중할 있는 상황이 되어 입시원서를 쓸 때쯤 우리집은 정시까지 지원못하니 수시에서 떨어지면 그냥 공장을 가든, 고시공부를 하든 수시가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시며 원서를 썼고, 

입시미술특성상 실기시험을 보러 원서를 쓴 대학이 있는 타지역으로 가는게 미성년자 혼자서는 위험하기에

같이 시험장이 있는지역까지 가셨는데, 가는 시험장마다 이게 번거롭게 뭐하는 짓이냐며, 이대학은 이래서 마음에안들고 이래서 싫고라고 말씀하시며 화를 정말 많이내셨던 것 같다. 돌아보면 그때당시에도 정말 미술하기를 너무 싫어하셨었다. 수시기간동안 여러학교에 시험을 보러다녔는데, 하루는 시험당일날 해당시험장이 아닌, 나도 모르는 전문대학교로 향하자 여기로 왜가냐, 시험장가야는데 어디를 가냐 했더니 엄마 멋대로 전문대에 있는 치위생과에 원서를 써서 면접을 보러가야된다고, 그날 정말 대차게 싸웠던 것 같다. 미친거아니냐고. 왜 그걸 몰래쓰고, 엄마가 뭔데 진로를 방해하냐고, 왜 멋대로 설계를 하냐며 그날 정말 묵혀왔던게 터져서 도대체 나를 뭘로 보냐며 버럭버럭 말하니"다 너잘되서하는거라고!!! 엄마는 뭐 이게좋아서해???미술?너 뭐 어떻게 먹고살수있는데? 왜 안정적이지도 않은 길에 자꾸 가냐고 내가 너 그러라고 돈보탠줄아냐" 하며대판싸우다 결국 졌다. 나는 당시에 미성년자였고 학생이였고, '부모인이상 내가 가출하고 연을 끊지않는이상 이 면접을 안보면 나는 미술시험실기장에 손끝하나 못대겠구나. 나는 힘이 없구나'를  비참하게 받아들이며, 최대한 덤덤한척 면접을 보고 집에 갔다. 정말 너무 화가나고 속상하다못해 왜이래야되는지 억울해서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데 이걸 내가 받아들이거나, 약한모습을 보이면 더 멋대로휘둘릴것같아서 울지도 못했었다.


또 운이 좋은건지, 엄마가 원했던 치위생과는 면접에서 떨어졌고 원서를 넣었던 몇몇 대학에서 합격통보가 날라와 미대에 진학할꿈이 확정되어 편안해질때쯤, 해외출장을 길게나가셨던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처치가 늦은바람에 반신마비가 되어 입국하시게되었다. 이에 엄마는 해외출장만 안나갔음 됐을텐데, 아니 너네 아빠가 평소에 지병관리를 잘했으면 됐는데, 술담배 그렇게 하지말라했는데, 이제 나앉게 생겼다며 절망하셨다. 

친가쪽에서도 반신마비에 당시 언어를 담당하는뇌까지 망가져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빠를 보더니 책임을 지지않으려고, 도와주지않다못해 외면하면서 장남인 사람이 쓰러져 제사장이 없어졌는데 이제 어쩌냐며, 그래도 장손이 해야지않겠냐며 오빠에게 제사장을 위임하려하시면서 그래도 저거 인간노릇도못하는데 ㅇㅇ이가 해야되는거 아니냐며 서로 말도안되는 말로 시시덕거리는 꼴을 보여주는 순간 그동안의 오만 정이 다떨어져 친가와도 그날기점으로 손절하듯나왔는데 다 ㅇㅇ이탓 아니냐며, ㅇㅇ이가 미술한다고해서 형이 해외출장갔다가 쓰러진거아니냐며 질나쁜 농담하시는 삼촌에게 다들 입조심하라며 애한테 그게할말이냐 했지만 엄마도, 어른들도 다 그런눈빛으로 쳐다보던 그 시선을 잊지못한다. 사실 아직도 그런생각을 종종한다. 내가 무리한 것을 요구한 탓이었던걸까 같은 죄책감이들어 아직도 아빠를 보기가 좀 힘들다. (피나는 재활훈련덕에 지금은 거동이 조금 불편하셔도 의사소통, 거동 등 많이 좋아지셨다) 그래서 고등학교 담임선생님한테도, 미술선생님한테도, 저 대학못갈것같다. 공장을 가야할 것 같다.라며 말을 하며 그래도 대학은 진학해라며, 주변의 어른들이 엄마를 설득하여 겨우 미대에 여차저차 진학하게되었다. 물론 이렇게 힘들게 진학했으니 당연히 대학다니는내내 언제당장 그만둘지 모르니 열심히해라 등의 말을 엄마에게 들어가며, 동기들끼리 여행을 갈 때도, 놀러를 가고 술을 먹으러 갈때도, 나는 이자리에 지금은 어울릴 수가 없다. 라는 생각으로 대학교를 어찌저찌 졸업을 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너무 힘들어서 졸업 후 3년을 은둔형외톨이로 살았다. 이상 사람에게 치일 힘도, 정신도, 우리집의 상황도 없어서 그렇게 은둔형으로 살다가 여차저차 포트폴리오를 재정리, 다시쌓아 재직을 하게되어 집에서 독립하게되었다. 이게 내가 독립하기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이 이후에도 또 많은 일이 있었다. 오빠가 보이스피싱을 당하며 모아둔 돈을 잃었는데, 이 과정중에서도 연락을 안한 니탓이며, 오빠랑 연락을 진작하고 니가 챙겼으면 이런일이 없지않냐는 질타와, 엄마가 시시때때로 힘들때마다 전화로 와서 너무 힘들다. 오빠도 엄마가 너무 과보호를 하는 점을 인지하기에 이부분이 싫어서 그만 하라할때마다 전화가와서 너가 좀 얘기좀 잘해봐라, 엄마가 너무힘들다. 그래도 니핏줄아니냐 라고 하는 등의 자잘한 이야기, 내가 조울증이라고 말하니 너까지 왜그러냐 너라도 멀쩡해야되는거아니냐는 등의 이야기등 이런저런 일들과 타박, 내 탓을 하는 둥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족이니 사랑했다. 아니 사랑하려고 했다. 최대한 이해하려고, 속상하지만 내가 감내할 부분은 감내해보기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새해 이야기에서 왜 여기까지 왔냐하면 절연하게 된 이야기를 하기위해 내 환경을 설명해야할 것 같아서이다.


설날 다같이모여 식사를 하고, 카페를 가서 어떻게 사는지 얘기를 하던 중 엄마가 여느 때와 같이,  남자친구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니 남자친구하고는 어디까지 생각하는데, 뭐 어떻게 살건데" 현실적인 말이다.

속 얘기를 빼놓고보면말이다. 이후 따라오는 말은 엄마는 그 남자친구가 마음에 안든다. 결혼 감은 아닌 것 같다. 현실적으로 니나이 이제 30이다. 여자나이 35살이면 여자로도 안본다. 그때가서 결혼하고싶다고 외치고 다녀도 결혼하기 힘들다. 진지하게 앞날을 생각해라. 니가 능력이 있냐, 그렇다고 돈이많냐, 직장이 번듯하냐. 진작 결혼할생각이 없으면 선을 보든, 다른남자를 만나든 서둘러 결혼해라. 너가 안정적이여야 오빠를 챙기지."의 말을 듣자마자, 너무 논리도 없는 고리타분한 말에 머리가 다아팠다. 남자친구라고 편들마음도 없고, 엄마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도 배제하더라도 불쾌한 말이었다. 


결론은 니가 안정적인 인간이 안될것같으면 결혼을 해서 너네오빠를 책임져라 라는 말이다.

이 같은 말이 앞서말에 한번에 걸친말이 아닌 평생을 들어온말이고, 결혼에 대해 정말 생각이 추호도 없기에

"내가 몇번이고 말한가치관이고 이 가치관은 안바뀔거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나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엄마가 바란대로 살지않을 것이다. 철없는 소리도 아니고, 이건 엄마가 왈가왈부할 부분이 아니다. 또한 멀쩡히 잘다니고 있는 직장에 대해서, 아니 내가 멀쩡히 잘다니고 없고를 떠나 사회생활부분에 대해서는 성인인이상 알아서 챙겨야한다고 생각한다. 일을 안하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고있는데 안정적이지 않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냐, 그런 논리면 소위 말하는 '사'직업이 들어가는 빼고는 다불안정한거아니냐, 결혼할 생각도 없는거 왜그러는지는 아냐, 엄마보고 생각한거다. 엄마가 허구헌날 힘들다고 못살겠다고 하던모습이 나한테는 너무불행해보여서 그렇게는 안살고싶더라, 아니 마음도 없는데 그렇게 살고싶지않더라. 어쩌다 결혼하게 생겨 애가 생긴다한들, 애한테 엄마처럼 그렇게 감정받이통으로 쓰게하고싶지도 않고, 애가 나로인해 불행해지는게 싫다, 나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왜 이이상 고통을 받아야하냐, 삶을 강요하지마라,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엄마가 바라는 삶대로 살지않는다고 나 불행한거아니다 그렇다고 바라는대로 사는것도 행복한거 아니다. 근데 왜 강요를 하냐. 오빠도 싫다는데 왜 엄마는 오빠의 삶까지 나한테 책임을 지라고하냐, 그거 오빠한테도 무례한 행동인거아냐, 그리고 엄마가 인지를 못하는것같은데 엄마가 결혼해서 엄마의 선택으로 애를 낳은거지, 그거에 대해 형제끼리 엄마가 애챙기듯이 챙기라는강요는 강압이라는생각 안하냐, 엄마가 낳았지 내가 낳은 건 아니잖아, 아니 엄마 나를 나로 보긴하냐고. 나를 인생대체재로 생각하는거아니냐고, 어떻게 엄마하고싶은건 그렇게 강요하고 옳다하면서 내 뜻은 보지를 않냐, 내가 내 인생을 내가 설계하겠다는데 도대체 뭐가문제냐, 내가 잘못된 길을 걷고있는 것도 아닌데 왜 엄마처럼 살기를 바라냐."라며 2시간의 의견을 받다보니 너무 힘이들었다. 끝까지 내 인생을 위한거라고 하지만 결국은 오빠를 보살피길 바라며, 아빠도 엄마도 내가 책임져달라는 그 말이 너무 힘겨워서 눈물이 그냥 났다. 그랬더니 "그게 그렇게 눈물이 나는 말이냐며 자기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고. 정한대로 말한대로 살면 안정적인데, 그게 너를 위한 길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거냐며 너는 너무 성격이 예민하다고, 너도 쪽팔린 삶은 싫잖아, 너자신도 그러잖아 라며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거만 들이는건 너아니냐며 너도 서러워서 우는거아니냐"등의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갈라섰다. 정확히는 오빠가 중재했다. 너무 열이 붙은 것 같다고. 그날 오빠는 나에게 너무 미안해하며(자기때문이 아닌데도 멍청하게 착해서 자기때문이라고하는데, 이마저도 오빠한테 상처를 준 것 같아 아니라고 내가 미안하다고, 집 조심히가라고 나 대신 엄마 좀 챙겨주라 나중에 연락할게하며 보냈다.) 


말을 주고받다보니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어릴때는 그저 반발심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상처를 직면하다보니 나는 대체재로 사는게 싫어서 발버둥을 쳤던것이고, 나로써 봐주기를 바랬던 것을 알았다. 어릴 때 아빠가 항상하던 말 중에 엄마에게 애 좀 그만 냅둬라, 감싸돌지마라 가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리고 확신했다. '우리 집은 이상하구나'라고 생각했던 내 어린시절이 맞았구나부모님의 여건이 힘들었던것도 , 상황이 힘들었던것도 환경적인 것을 다 떠나서, 엄마는 나를 자신의 역할로 만들고 싶었구나.  

내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내자신의 모습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화가 났었구나, 그래서 집에서 그렇게 화가났었구나, 어릴때 겪었던 일들도, 오빠 취업자소서를 대신 몇번이고 써주던 그것도, 오빠밥상을 차려줄때도 왜화가났는지, 그놈의 오빠..아니 그놈의 대체재가 지긋지긋해서 그랬구나. 그래서 가족모임이 파토나고 울면서 내 집으로, 걸어서 장장 3시간 거리를 걸어갔다. 너무 화가나고 바뀌지 않는상황에 속이 답답하다못해 질식할것같고, 역겨워서 소리지르고 때려부수고싶은데 그냥 참으면서, 너무 화가나서 땅을 팍팍걷어차면서, 손은 주먹을 꽉쥐어서 손톱자국이 남을정도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 화를 신체로 억누르듯이 집에 갔다.

내 집에 돌아오니 내 반려견과, 남자친구가 맞이해주었다. 그제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 작은 생물체가 핥아주니 그제서야 좀 내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지만, 남자친구에게도 내 반려견에게도 내 친구들에게도 그누구한테도 털어놓을 곳이 없어 혼자서 꼬박 이틀을 잠으로 도망가듯이 잤다. 산책하고 밥먹는시간빼고는 거의 도피하듯 잤다. 사실 이전에 다른글을 작성하고 있었는데도 이 글을 먼저써야 할 것 같아 작성하고있다. 역시 더이상은 이렇게 못살것같았다. 몇년을 얘기하고 몇년을 지속적으로 얘기해도 바뀌지 않는다. 아니. 받아들이고자하시질 않는다. 이대로 살면 정말 돌아버릴것같고, 한번보러갈때도 숨이 막혀서 마음 꾹 다지고 가는데, 더이상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연락처 차단을 해버렸다. 올해 말 집계약기간이 끝나면 그냥 아예 먼 거리로 갈것이며, 연을 끊기로 작정했다.


전에 이와 비슷한 상황을 타인이 겪은 얘기처럼 말한적이 있었는데, 이래서 이사람이 연끊을생각이라고 한다 라고 빗대말하니 그래도 하늘이 이어준 인연이라는게 있고 혈연이있는데 핏줄이 쉬이끊기느냐 그런걸로 끊는게 더이상한거아니냐는 말을 주고받은적이 있었는데. 이때도 대충 예상했다.내가 저런상황이 오더라도 엄마는 분명 위처럼 받아들이면서 괘씸해하고 이상한사람취급을 하겠지. 내가 정말 밉겠지, 속상하겠지 그래서 쉬이 결단내리지 못했었다. 내가 엄마를 아프게하는게 싫어서 이렇게까지 걱정하는데, 그마음이 짓밟히고 짓밟히니 못하겠어서 연을 끊기로 했다.


 내 삶의 방식이 밟혀서도, 내 남자친구를 무시해서도, 삐뚤어진 생각도 아닌, 그저 나대로 봐달라는 생각이, 내 인생을 살고싶다는게 문제라면 그냥 그 문제점을 안고 사는게  맞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냥 나답게 살고싶어 선택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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