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으로 연애 프로그램에 빠지다 - 넷플릭스의 솔로지옥을 보고
오늘은 우리 집 보일러가 고장이 나 급하게 인근 호텔로 피신을 왔다.
원래는 애인이 퇴근 후 최근 심리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친한 언니가 우리 커플을 위해 준비한 TCI 검사를 함께 하려고 했는데, 저녁에 계획 해 놓은 일정에 변수가 생겼다.
보일러가 고장나는 것은 지어진지 15년이 좀 안된 아파트에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사는 동안 보일러 교체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건만 엄청 추운 날 그렇게 될 줄이야.
내가 제 시간 안에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수리 기사님을 불렀더라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는 오늘 또 대자연의 첫날을 겪으며 하루 종일 진통제를 먹고 잤고 네시반 쯤 겨우 눈을 떴을 때 내가 느끼는 추위가 생리통으로부터 오는 오한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상황 파악을 했을 무렵, 새로운 직장에서의 연락, 애인의 부탁, 엄마의 연락 등이 밀려 순차적으로 해결을 하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려고 했을 때가 오후 여섯시가 넘었다. 아뿔싸. 점심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일만 하다 올 애인에게 많이 미안해졌다. 하지만 미안한 와중에도 너무 좋지 않은 컨디션에 다시 침대로 직진했고, 과하게 비싸고 큰 새 침대가 제 몫을 톡톡히 하며 나와 고양이 두마리의 체온을 유지시켜주었다. 길냥이 출신이면서 추워졌다고 바로 이불 아래로 들어가는 귀여운 우리 집 고양이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 늘 그 모든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넘기며 앞장서서 모든 것을 정리 해 주는 애인 덕에 밀린 분리수거를 하고 (매주 화요일에만 분리수거를 할 수 있는 딜레마라니) 집 인근의 호텔에 자정이 되어서야 도착해서 드디어 따수운 물로 목욕을 하고, 약간의 천국을 느끼며 최근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쓰려고 노트북을 켰다. 오늘은 하루 종일 자고 먹고 밖에 안 했는데 피로한 상황 끝에 따수운 물로 목욕을 좀 했다고 그새 또 노곤노곤을 한 것을 보면, 얼른 글을 쓰고 자야겠단 생각을 한다.
서론이 길었다.
나는 요즘 난생 처음 연애 프로그램에 빠져 캐릭터 분석을 하며 재미있게 보고 있다. 친구들이 하트시그널, 짝 등등을 이야기 할 때 전혀 관심이 없어 말이 통하지 않아 늘 대화에서 열외였는데 내가 나이가 든 것인지, 아니면 넷플릭스의 자본덕인건지, 그 것도 아니면 그냥 출연진들의 화려함 때문인 것인지, 나는 요즘 넷플릭스에서 하는 '솔로지옥'을 재미있게 보고있다. 이미 인스타그램 등에 떠도는 스포일러로 최종화의 결말까지 다 안 상태지만, 현재는 7화를 보고 있다. (원래 오늘 마지막까지 마치려고 했으나, 보일러 네 이놈..)
무인도에 젊은 싱글 남녀가 갇혀 일주일동안 연애를 위한 경쟁을 하는 다소 식상할 수 있는 세팅과, 어디까지가 대본인지 가늠할 수 없으나 꽤 뻔한 서사와 러브라인 등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이 재미있는 것은, 당연 첫번 째는 출연진들의 수려함 덕이고 두번 째는 미묘한 감정선과 관계의 힘 조절 등 때문이다. 미묘한 감정선과 관계의 힘 조절이라니, 내가 제일 관심 없어하고 피로해 하는 것 아니니. 그런 것 때문에 연애프로그램이나 로맨스 영화 등을 보지 않는 것 아니었니. (나도 아줌마가 되었나보다)
여하간에 내가 이 프로그램을 보며 제일 좋아하는 남자 캐릭터는 문세훈씨, 그리고 재미있게도 제일 좋아하는 여자 캐릭터는 신지연씨이다. 처음에는 타 남자 출연자들에 비해 그렇게 크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이 없던 문세훈씨. 수려한 외모의 오진택씨 (배우 이진욱이랑 매우 닮았다, 쿨케이와 쿨제이도 닮..), 요즘 느낌으로 수려한 외모와 피지컬의 김현중씨, 그리고 아이돌 느낌의 최시훈씨, 그리고 정말 미안하지만 볼 때마다 머리를 빗어주고 싶은 김준식씨에 비해 문세훈씨는 그렇게 뛰어난 매력이나 돋보이는 캐릭터 없이 다소 짠내나는 모습,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 요리를 잘 하는 모습, 다른 사람을 잘 챙기는 모습 등으로 사람들에게 기억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켜보면 그 속에 돋보이는 본인의 소신, 승부욕 그리고 어른스러움등이 정말 내 눈에는 '쿨'하고 멋있어 보였다.
신지연씨의 경우 작위적이지 않고 예쁘고 잘났다. 나는 작위적인 것이나 척을 싫어한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이렇게 이야기 하면 정말 내가 구시대적이지만 그렇기에 나는 성형수술, 시술 등이나 본인다움을 덮어버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의 유약한 부분을 커버하기 위한 척 역시도 싫어한다. 상대방이 그럴 때면 그걸 잘 느껴 속으로 불편해 하는 동시 나 역시도 그럴 때가 있는데 그런 스스로를 인지하는 것은 더 자괴감이 느껴지기에 최대한 솔직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 것이 욕망의 표현이든, 스스로에 대한 인정이든, 관계에서 느낀 바든. 물론 쉽지는 않다.
보기에도 유독 돋보이는 외모 외에도 신지연씨의 매력은 느릿느릿하면서 여유롭고 오버스럽지 않은 말투, 과하지 않은 표정, 그리고 똑똑함이 있다. 할아버지가 알츠하이머를 앓으셔서 토론토 대학교에서 뉴로사이언스 전공을 하고 있다니, 그게 얼마나 진정성 있는 서사인지 모르겠으나 여튼 내가 좋아하는 서사는 맞다. 그래서 프로그램 내 모 남성 출연자가 그녀가 대학생이라고 했을 때 "승무원학과?"라고 이야기를 하는게 기가 찼다. 나는 예쁘고 잘난 여자들이 외모로만 승부를 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많이 탈피 시켜주고, 더 다양한 분야에서 막 "나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 것은 절대 승무원이라는 특정 직업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유독 일부 한국 남성들이 머릿 속에 특정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대한 업신여김(!) 인 것이다.
여하간에 둘의 로맨스가 흘러가는 과정에서 내가 유독 재미있게 본 부분은 신지연씨가 문세훈씨에게 "언제 본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냐" 같은 뉘앙스의 질문을 한 부분이었다. 문세훈씨는 그 계기가 정말 별 것 아니었다며, 그녀가 분홍색 옷을 입은 문세훈씨를 칭찬하며 본인이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 였다고 했다. 핑크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한 그녀의 말에 "앞으로 핑크색만 입어야겠다"라고 화답을 하는 그는 그 순간 공통점을 찾으며 빠르게 그녀에게 그 찰나 빠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정말 사소한 계기에 사랑에 빠진다. 돌이켜보면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될 수 밖에 없는 각자의 스토리들이 있고, 어쩜 나는 그 당사자들만 모르지 알게 된 처음부터 무언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도 한다. 문세훈씨가 처음 지옥도에 온날 많은 여자출연자들을 만나며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대한다해도 유독 신지연씨가 예쁘다, 혹은 눈에 들어온다 정도의 호감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문세훈씨의 다소 어이 없는 계기를 보며 나는 애인과 나의 관계를 더듬어 보았다. 우리는 일을 하는 동료로 만나 당연 처음에 보자마자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는 상상을 할 수 없는 관계 였다. 나도 그도.
다만 사랑에 빠지는 계기는 정말 새삼스럽고 찰나라고 생각이 드는 일이 있었다.
우리가 매일 연락을 시작하고 한 달 정도 되었을까, 처음으로 단 둘이 밥을 먹으러 우리는 경기도 외곽의 어딘가로 갔었다. 그 전에 이미 우리는 동료들과 우르르 밥을 몇 번 먹었고,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는 첫 자리에서 그가 모두를 집에 보내고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었다. 밤에 혼자 걸었으면 조금 무서웠을 수도 있는 길을 새벽녁에 함께 걸었고, 가는 길에 꽃 자판기에서 꽃을 뽑아서 준 그 밤 이후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 계속 연락을 했기에 그가 내게 호감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정도 그 것은 가변성이 있는 호감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만에 처음 단 둘이 밥을 먹으며 우리는 다소 허름한 집에서 옻닭을 먹었고 (내가 이런 곳에 가자고 해서 약간 멘붕이었다고 한다), 다진마늘과 파를 잔뜩 넣어 강한 냄새를 풍기며 인근에 뷰가 좋은 카페로 갔었다. 그 때는 아직 여름이 오기 전이라 수박이 나오기에는 조금 이른 시점이었는데, 카페에는 수박주스를 위해 수박을 소분 해 놓은 컵 등을 냉장 진열장 안에 디스플레이를 해 놓고 있었다. 그 컵을 본 애인은 "수박 먹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점원분께 "수박 썰어놓으신 것 갈지 마시고 그냥 바로 먹을 수 있게 포크만 주세요. 가격은 수박 주스 가격으로 낼게요" 라고 했는데, 애인은 그 찰나 "이 여자다. 이 여자가 맞았다!"라는 생각에 이미 본인의 마음은 수박씨를 타고 저 먼곳으로 날아가 카페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이 여자다!"라는 생각만 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그렇게 "사랑에 빠진 순간"이 다소 의아해 어느 여자라도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라고 하니 그의 말로는 보통 직접 이야기 해라, 주스로 먹어라 등의 대처를 하는데 나는 그 어떤 거리낌 없이 그렇게 수박을 시키는 것이 달랐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 역시 나처럼 했을 것 같긴 하나, 여하간 그의 마음은 별안간 수박씨를 타고 날아갔고 그게 그의 문세훈씨의 "핑크의 순간", 그리고 우리의 0.2초 같은 순간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인연과 사랑은 정말 그 "찰나"에 시작이 되었을까. 그 수박이 계기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외에 많은 자잘자잘한 우연들이 있었고, 순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이 "알아차릴 수 있는 순간"은 그러한 별안간의 일들과 함께 찾아오고, 그렇게 인연이 시작 된다고 생각이 든다.
아마 문세훈씨와 신지연씨의 서사는 대본이 반이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 시리즈가 흘러가는 내내 그가 보여주었던 진정성과 (작위적인 진정성일지언정 넷플릭스의 편집이 그 작위적임을 잘 커버했다) 그 과정에서 서서히 변하는 신지연씨의 감정선을 보는게 참 재미있었다. 사랑은 가지각색이지만 결국 사랑의 과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비슷한 부분 역시 있다고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넷플릭스가 그들만의 감각과 자본으로 또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염원도 하는 바이다.
여담이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고 아까 애인과 누워 나는 솔로의 빌런들 영상을 잠깐 봤는데 정말 여러모로 부애가 나고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