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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 Days Mar 13. 2022

내가 살던 곳에 전쟁이 터졌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우크라이나, 그리고 그 곳의 사람들을 위한 기도

2월 24일 가족톡방


내가 5년을 살았던 나라에 전쟁이 터졌다. 나의 10대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글을 써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주가 지났다. 처음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국 국민들이 힘을 모을  있게 노션페이지를 제작  볼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새로이 입사한 직장에서의 일과 겹쳐 일이 많다는 핑계로 고민만 하는 것에 그치게 되었다. 나의 미천한 힘을 어떻게 보탤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를 고민하다  입장에서는  십만원 정도의 작은 (그들에게는  십명을 살릴  있는 약을 구매하거나, 식량을 구비할 있는 금액이다) 기부, 그리고 정보를 계속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인스타그램을 통해 나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극적이거나 SNS용으로 편집 된 콘텐츠는 걸러내려고 노력을 했다. 그 와중 마침 일주일동안 강화도로 기도를 가셨던 엄마는 전등사에서도 내내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하고 돌아오신 뒤 스베따 이모와 연락을 했다. 스베따 이모는 우리 집에서 상주하시던 도우미 아주머니인데 (스베따 이모에 대한 내용은 여기서 더 볼 수 있다) 몇 주 전까지만해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에 괜찮냐고 물어본 엄마의 연락에 모두 다 너무 안전하고 조용하니 얼른 놀러오라고 반갑게 답을 하던 이모는, 지금 너무 무섭고 사위의 본가로 피신 중이라는 답변을 주었다.


우크라이나의 사태는 단순 친러와 친유럽간의 분열, 미숙한 코미디언 출신의 대통령 등, 한가지 이유로 일어났다고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우크라이나는 너무나도 오랜동안 정치적 혼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는 특권 계급의 퇴행적 정치, 전혀 융화되지 않는 친러와 친유럽의 갈등 등으로 점점 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빈곤해져갔다.


내가 우크라이나의 수도에 있는 국제 학교를 다닐 당시, 우리 학교의 우크라이나인들 중 팔할은 그 나라에서 '특혜'를 받은 정치인들과 재벌 자녀들이었다. 8학년 때 그 학교를 처음 입학하며 영어가 아직 부족했던 내가 가장 빨리 배운 단어는 corruption이었고, 그 단어는 현지 우크라이나 친구들이 자국의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단어였다. 2004년 오렌지 혁명 때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드디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손아귀에서 조금 벗어나 더욱 더 민주주의적이고 친-유럽적인 국가로 발돋움 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당시 오렌지 혁명 때 나는 우크라이나에 거주 중이었고, 혁명 이후 당선된 유셴코의 자녀들 역시 우리 학교를 다녔다) 모두가 기대했던 유셴코 정권 역시 파벌과 부패로 민심을 잃어 사실상 실패한 정권으로 끝났다. 오렌지 혁명 당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얼마나 '새로운 우크라이나'에 대한 기대가 컸는지 피부로 느꼈기에 (한국이 OECD 가입 전에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 정권의 말로가 좋지 않았단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는 매우 아쉬웠다. 오렌지 혁명을 직접 목도하며, 그 것도 도심에 살고 있던지라 바로 집 앞에서 보며 느꼈던 점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매우 평화롭고 온순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시위가 있을 때마다 광화문을 지나며 늘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나는, 그 때마다 느끼는 불쾌감과는 사뭇 다른 평온함과 고요한 자성 같은 것을 지닌 우크라이나의 국민성에 감명을 받았었던 것 같다.


여하간 오래 전부터 쌓이고 곪아왔던 것들이 2014년 돈바스 전쟁 (당시엔 국제사회에서 단순히 내전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2022년 2월에 터진 지금의 러시아의 테러로까지 이어졌다. 푸틴이 여전히 우크라이나를 자국 영토 어디쯤 (아마 중국이 한국을 생각하는 정도, 나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정말 아찔했던 부분이 많았다)으로 여기기에 지속적으로 NATO와 EU를 가입하려는 우크라이나를 무마하려 그렇게 무식하게 테러를 저질렀던 것일테고, 이건 러시아 국민들의 의지와는 달리 푸틴의 시대착오적이고 독단적인 행위라고 생각이 된다.


당시 우크라이나에 거주할 때, 헬스장이나 쇼핑몰에서 나를 보며 '중국인'이라고 놀리며 인종차별을 하는 아이에게 나는 능숙하지 못한 러시아어로 "너넨 유럽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지만, 유럽은 너희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도 유럽은 되지 못할거야." 라고 했던게 기억이 난다. 열여섯살의 나는 그게 그들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지리학적으로는 "동유럽"에 위치해있지만 구소련의 티를 제대로 벗지 못하고 유럽에서는 슈거대디를 찾는 여자들로 가득한 나라로 (업신)여겨진 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무언가 깨닫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름의 독설을 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했던 말들 역시 뒤늦게 마음 한구석을 묵직하게 만드는 후회로 돌아왔다.


나는 부디 순박하고 온순한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길 바란다고 매일 기도를 한다. '전쟁을 멈추라'라는 말 속의 '전쟁'이라는 키워드에 집중을 하면 전쟁 자체에 에너지가 모인다는 에너지의 이치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평온함 그리고 평화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하지만, 단순히 제 3국 어딘가가 아닌 실제 소중한 사람들이 그 곳에 있고, 10대의 향수가 전부 그 곳에 있는 나에게는 다소 냉철하고 차분할 수 없는 주제인 것 같다.


나의 결혼식을 앞두고 한 점을 빼는 피부과 시술로 인해 며칠 동안 햇빛을 보면 안되는 탓에 러시아 대사관 앞에 시위를 나가지 못해 애석해 하시던 아빠도 (아빠는 특히 우크라이나에 사시던 당시 현재 가장 많은 폭격을 받고 있는 도시 중 하나인 하리코프의 축구 구단을 스폰서 하시며 그 지역으로 출장을 자주 가셨어서 우리보다 마음이 더 무거우신 것 같다), 우크라이나를 위해 계속 기도하며 스베따 아주머니랑 연락을 하는 엄마도, 그리고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들을 하고 있는 나와 내 동생도 - 그 나라에 빚을 진게 많은 것 같다. 우리가 누렸던 많은 것들, 그 곳의 아름다운 자연, 순박하고 온순한 사람들, 멋진 문학적 그리고 예술적 소양 그 모든 것들이 고맙고 또 계속 지켜졌으면 좋겠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때문에 나는 이번 대선  더욱  나의  표가 어떤 힘을 행사할  있는지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투표를 했다. 나에게는 차악을 뽑는 대선이었기에 내가 표를 던진 대상 역시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우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 둘러쌓있는 커뮤니티와  넘어서 세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크라이나를 도울 수 있는 정보들이 모인 링크를 올리니 많은 사람들이 클릭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어 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우크라이나에서 내 동생, 그리고 우리 집 강아지 곱단이
우리 집 앞 - 키예프의 "니꼴스꼬 보따니체스까야" 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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