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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Oct 23. 2023

<나의 트랜지션 일기> 6장: 남자의 적은 남자

남자라면 페미니즘 합시다.

[6장: 남자의 적은 남자]

     

나는 페미니즘 활동을 하면서 남성으로서의 나의 위치를 최대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말도 여자가 하면 듣지 않지만 같은 남자가 하면 먹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여성에 비해 성별권력을 가진 입장으로서 내가 좀 더 나서서 남성들을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남성집단 안에서 소수자의 지위에 있어왔기 때문에 남성들이 가진 권력을 해체하는게 나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여겼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여자들이 안전하지 못한 세상이라면 나 역시 안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감각이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당시에는 여자들이 차별당해왔던 것에 대한 대항언어로서 ‘미러링’ 이라는 전략이 많이 쓰였다. 거울에 비춰서 보여주듯이 그대로 되돌려준다는 의미로서, 기존에 관습적으로 쓰이던 “남자는~~”, “여자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에서 성별만 바꿔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남자는 조신해야지”, “큰일은 여자가” 등이 있다. 물론 많은 남성들이 거부감을 느꼈고,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말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난했다. 나는 오히려 ‘남자는 조신해야 된다’는 말이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나한테 안 맞는 옷을 억지로 껴입지 않아도 된다는게 안도가 되었다.

수줍음 많고 쉽게 부끄러워하는 ‘여성적’인 내 성향이 페미니즘이라는 우산 아래에서는 더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우산 밖으로 나가면 가부장제라는 세찬 빗줄기에 홀딱 젖을 수 밖에 없었다. 페미니즘이 이슈가 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우리 사회의 젠더체계에 균열이 생기는걸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페미들은 남자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 라며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남자들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아도 기분이 나쁜 정도로 끝나지만, 여자들은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도 잃을 수 있다” 라고 아무리 말해도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여자들의 입장을 너무나도 공감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답답하고 화도 났지만 그런 남자들을 바꾸는게 바로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남자들과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친구한테는 만날때마다 페미니즘을 얘기를 해서, 처음에는 “너는 왜 여자편만 드냐” 라는 말을 들었다가 이후에는 “듣다보니 페미니즘이 필요한거 같기는 해” 로 바뀌었다. 그 친구가 언제는, '남자혐오하는 페미들 한번 만나보고 싶다, 궁금하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내가 “네가 지금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권력이야. 여자들은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할 수 없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지” 라고 대꾸했는데 그게 그 친구한테 굉장히 와닿았었던 것 같다.     


학내에 대자보를 붙이고 난리가 났을 때, 총학생회에서는 결국 사퇴를 했지만 내가 활동하고 있던 인문학 동아리에서 젠더이슈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서 내가 패널로 참가했다. 화를 내던 남학우도 있었으나 나도 최대한 차분하게 의견을 전달하려고 했고, 우려했던 것처럼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남자가 말하니까 조금 더 들으려고 하는 느낌도 있었다.      

페미니즘 모임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집회나 행사에 참가하였고 온라인에서는 페미니즘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과 매일같이 설전을 벌였다. 그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버팔로’ 였는데, 여자들한테 잘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조롱할 때 쓰는 멸칭이다. 매우 여성혐오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남자인데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것은 다 여자들한테 잘보이기 위한 목적인거 아니냐라는 거다. 물론 실제로 그런 남자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오히려 내가 만든 모임에서조차도 은근한 배척을 받았었기 때문에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특히나 성폭력·성착취 이슈가 가장 화가났다. 페미니즘 단체 집회를 나가거나 내가 직접 1인시위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흔히 남자들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지만, 여자의 적은 남자인 경우가 훨씬 많고, 남자의 적도 남자인 경우가 많다.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나를 공격하거나 모욕했던 사람의 성별은 정말 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었다. ‘남자답지 못한’ 무언가를 비하하고 경멸하는건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내가 겪은 피해나 부당함을 더는 겪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길 바랐다. 오랫동안 맨박스에 갇혀있었고 남중-남고-군대를 지나왔기에 남성문화에 대해 누구보다 빠삭하다고 자부하는 나는 남성의 시선에서 가부장제와 남성성을 비판하려고 애썼다. 당시에 내가 sns에 써왔던 글들 중 일부를 첨부하며 이번 장은 마무리하겠다.


<40-60대 남성들에게>

최근 한 달동안 회사, 가족, 각종 모임 등에서 외식을 할 때 수저 놓기, 물 떠오기, 셀프반찬 가져오기를 주로 누가 했는지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누가 했는지 잘 생각이 안 나십니까? 그건 당신이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꼭 수억 대의 돈을 움직이고, 수백 명의 사람을 움직여야만 권력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 자체가 권력입니다.
식사자리에서 당신이 시덥잖은 아재개그를 날리고 있을 때 누군가는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고, 테이블 당 명수를 세면서 물컵을 따르고, 어떤 밑반찬이 부족한 지, 무엇을 언제 얼마나 가져와야 하는지를 헤아리고 있을 것입니다.
권력을 모두 내려놓기란 아마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다만 때로는 할 말을 줄이고 한 걸음 물러나서 자신이 모임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나의 편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에 기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자들이 "여자가 없으면 칙칙하다"고 하는 과학적인 이유>

1. 여자를 눈요깃거리로 생각하기 때문에(잘생겼다는 말은 사람한테만/ 예쁘다는 말은 물건한테도 씀).

2. 여자에게 요구되는 성역할(감정노동, 보살핌노동 등)을 원하기 때문에.

남자들은 여자가 무표정이거나 말투가 조금만 딱딱해도 "무슨 안좋은 일 있냐" "너 얘 싫어하냐" "무섭다~" 면서 후려침.
겉으로는 추켜세워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통제인거다.
지들한테 사근^사근하게 웃어주고 상^냥하게 말해주길 바라니까.

3. 서열경쟁에서 자유롭고 싶기 때문에.

남자들 무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서열이 나뉘고, 서열 최하위인 남자를 먹잇감 삼아 무시하고 까면서 남자들은 즐거워한다.
그러니 남자들만 있으면 그 한 명이 되지않기 위해 암묵적인 서열경쟁을 해야되는데, 여자가 있으면 남자들은 자연스레 여자를 서열 최하위로 취급하니 불필요하게 눈치보느라 에너지 쓸일 없어서 좋은거지.
지맘대로 얼평, 몸평할 수 있고 감정노동 안한다고 후려치기 할 수 있으니 좋겠지.    
<성별에 따른 도덕성의 기준 차이>

여자한테 "쓰레기네" 하는 경우

▶ 연애하다가 양다리 걸쳤을 때, 잠수이별 할 때, 식당에서 진상짓 할 때, 서비스직인데 불친절할 때, 소개팅에서 남자 재산 물을 때

남자한테 "쓰레기네" 하는 경우

▶ 폭행,살인,강도,성희롱,성추행,성폭행,스텔싱,불법촬영,불법촬영물 유포,데이트폭력 등등
<꾸며라>

남자들도 제발 좀 꾸미고 다녔으면 좋겠다.
외모를 꾸미지 않을거면 다른거라도 좀 꾸며라.
예를들면 말할 때 말을 좀 꾸며서 예쁘게 말했으면 좋겠다.
'팩트' 이기만 하면 아무렇게 말해도 되는줄 아는 남자,
잘 모르면서 단정적으로 말하고 지적질 하는 남자,
거칠게 말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친분의 증표인줄 아는 남자들 진짜 너무 싫다.
말에도 거울이 필요하다.
자기가 어떻게 말하는지 자주 들여다보고
말을 좀 꾸몄으면 좋겠다.
<털털한 여자?>

남자들이 말하는 '털털한 여자'는 이중규범으로 작동할 때가 많은 것 같다.
 - 외모에 너무 신경쓴다는 티는 안내지만 한 듯 안한듯 적당히 꾸밈노동은 해야됨
- 몸무게를 스스럼 없이 밝히며 '내숭' 없이 잘먹지만 자기보다 살찌면 안됨
‘가식’ 없이 솔직하면서도 자신의 기를 죽이는 말은 하면 안됨
- 섹드립(을 가장한 성희롱)을 웃으며 잘 받아줄 줄 알아야 되지만 자기보다 성에 대해 많이 알거나 경험이 많으면 안됨
 게임,스포츠 등 남성문화에 대해 적당히 이해도는 있어야 하지만 자기보다 잘하면 안됨
<못생겨서 인기없다?>

많은 남자들이 자기가 여자들이랑 원만하고 폭넓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 자기가 못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얼핏보면 주제파악(?)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겸손함 같은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맺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스킬이나 감정노동 등을 계발.소모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내가 못생겨서 그런거야' 라고 하면 얼굴따지는 여자들이 문제라고 편하게 탓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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