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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Oct 20. 2023

<나의 트랜지션 일기> 5장: 페미니즘 입덕

내가 몰랐던, 하지만 알아야만 했던 세계

[5장: 페미니즘 입덕]


고단하던 군생활은 어찌어찌 잘 견뎌서 병장 만기제대 했다. 군사주의와 징병제에 비판적인 관점을 가진 것과 별개로, 나는 이 사실이 자랑스럽다. 어쨌든 그 힘든 과정을 큰 사고 안치고 잘 넘겼으니 말이다. 물론 정병이 오긴 했다. 전역이 3월 초였기에 마음만 먹으면 바로 복학할 수 있었으나 나는 회복기간이 필요했다. 휴학을 1년 연장하고 쉬었다. 1년간은 그냥 별다른거 없이 알바하고 취미생활 하면서 보냈다.

그러고 다시 대학교로 돌아왔다. 24살의 나는 이미 20살때와의 나하고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더 이상 남성성 덕질을 하지 않았으며 ‘형’들을 쫓아다니지 않았다. 억지로 내 몸에 맞지않는 마초스러움을 추구하기 보단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좇으며 살기로 했다.


나는 어렸을때부터 굉장히 내향성이 강했고, 활동적인 것보다는 혼자 가만히 앉아서 사색하고 책읽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복학 이후에는 내가 관심을 가졌던 인문학이나 종교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물론 그때에도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흔히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지식이나 논리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논리적으로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는 그런 것들.

그러다 내가 대학교 3학년이던 2016년 5월, 대한민국 여성운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 사건이 터지고 언론과 인터넷 여론이 들끓었다. 물론 살인사건이라는건 그 자체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끔찍한 일이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분노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자라서 죽었다,” 라고.

수많은 남성들은 그 문구에 거부감을 느꼈을테지만 나는 우선 들어보려고 했다. ‘여자라서 죽었다고..? 여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거지..?’ 여기저기서 여성들이 하는 얘기를 다 찾아봤다. 늦은 밤거리를 혼자 걸을 때의 공포, 택시를 혼자 탈 때의 공포 이런건 내가 그동안 남성으로 사회화되어 오면서 느껴본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물론 나도 남자중에선 체구가 작은편이니 두려움이 있을때도 있지만 적어도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의 위험이랑은 결이 다른거니까.


그래서 그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반응이 계기가 되어서 페미니즘에 입덕(?) 하게 되었다.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페미니즘 책을 찾아 읽고, 연관된 강연을 찾아 듣고, 내가 다니던 대학교 지역에는 페미니즘 모임이 없어서 직접 만들었다.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나의 세계관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되는게 좋았다. 그동안 남자다워야 한다는 맨박스에 갇혀있던 나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는가, 또 그것이 나의 삶을 얼마나 옥죄었는가를 깨달으며, 한편으로는 해방감이 있었다. 그래, 남자가 남자다울 필요 없고 여자가 여자다울 필요 없어, 우리는 그냥 우리이기만 하면 돼, 그리고 우리가 우리일 수 없게 만드는 낡은 가부장적 사고와 성역할 고정관념을 해체하면 돼. 라고 생각했다.     


당시 지역에서 내가 만들었던 페미니즘 모임 포스터. 지금 보면 여러가지로 촌스럽고 부족함이 많지만 의미있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그렇긴 하겠지만, 그때에는 페미니즘지지하는 남자들이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다들 나를 신기하게 봤다. ‘아니 어쩌다..?’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거 아니냐는 시선부터 또 반대로 ‘게이인거 아니냐’ 라는 시선까지 다양했다.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이것 또한 성별권력이긴 하다. (내가 그때도)여성이었더라면 달랐을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페미니즘 운동을 위해 총학생회 여학우부(당시 이름은 그랬다)에 들어갔다. 총학생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었으나 총학생회장이었던 학우가 나를 많이 지지해주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강남역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시끌시끌 했을 무렵, 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여 총학생회 여학우부의 이름으로 여성혐오를 규탄하는 대자보를 게시했다. 어느 정도의 비난은 감수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졌다.

학내 익명 게시판이 거의 마비가 될 정도로 내 욕으로 도배가 되었었는데, 나는 그렇다치고 이 대자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았던 여학우부장까지 욕을 먹는 상황이 나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이윽고 여학우부장의 남자친구가 나에게 연락해 대자보를 내리라고 윽박지르는 일도 있었다. 결국 총학생회장이 직접 나서서 책임지고 그 사태를 수습했고, 총학생회 내부에서는 아무도 나를 반대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지만 의욕이 앞섰던 내 행동에 도의적 책임을 느껴서 나는 여학우부 차장에서 자진사퇴하게 되었다. 당시 나를 지지해주었던 총학생회장에게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당시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썼던 대자보. 학교가 발칵 뒤집혔었다.


페미니즘 모임 홍보할때는 장난전화 거는 인간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제일 힘들었던건 딱히 내가 ‘동료’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경험이었다.

나는 내가 페미니즘 모임을 직접 만들고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했다. 그런데 어떤 멤버는 나에 대해서 마음에 안드는게 있으면 내가 ‘한남’ 이라서 그런거라고 비꼬았다. 그 사람은 말을 툭툭 세게 내뱉는 성향이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조금 어려워하자 ‘내가 여성이어서 그렇게 느끼는거다’ 라고 하였다. 어느 날은 본인이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을 언급하며, 남자는 무조건 나이가 어려야 된다면서 대뜸 내 나이를 지적하며 나는 퇴물이라고 하였다. 그런 말을 비롯한 그 분의 이러저러한 말들이 내겐 상처가 되었다. 물론 남성권력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고, 남성 개개인의 성찰과 반성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개인간의 관계가 오로지 그렇게만 정의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그냥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동료이길 바랬으나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모임의 몇몇 멤버들은 그 분을 ‘대모님’이라고 부르며 따랐고, 남성인 나에 대한 시선이 처음엔 우호적이었으나 차츰차츰 미묘하게 적대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상처와 고민을 안은채로 모임장의 자리를 다른 분께 넘겨주고 나는 모임을 탈퇴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 ‘대모님’은 철저히 분리주의적인 노선으로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대학교 졸업 이후에 그 분이 sns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입장을 적어놓은 것을 보았고, 나는 조용히 차단하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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