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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Nov 17. 2023

<나의 트랜지션 일기> 25장: 법적 성별정정(3)

'1' 에서 '2'로

[25장: 법적 성별정정(3)]



판사의 심문기일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어떤걸 물어보는지, 결과는 보통 어땠는지를 찾아보았다. 애초에 성별정정과 관련된 법률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사무처리지침을 참고하면서 하는거라 판사의 재량권이 컸다.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차이가 심하다는 것이다. 판사를 잘 만나면 요건을 조금 덜 갖춰도 허가받기도 하고, 판사를 잘못 만나면 요건을 다 갖췄는데도 어이없이 기각당하기도 한다. 성확정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여성이나 자궁적출을 하지않은 트랜스남성의 성별정정을 허가한 사례가 있는가하면, 트랜스여성이 의학적인 수술을 다 마쳤는데도 ‘여성의 외형을 충분히 갖추지 않았다’ 라는 황당한 유로 기각당했다는 사례도 있다.

‘여성의 외형’ 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항상 느끼는거지만 시스젠더들이 만든 성별이분법적 기준은 너무나 편협하고 부적절하다. 게다가 자신이 정체화하고 확립해온 성별정체성을 생전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중년남성의 판사가 판단한다는게 참으로 불쾌하고 모욕적이다. 심지어 어떤 판사가 트랜스여성에게 ‘수술한 성기사진을 증거로 보여달라’고 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대한민국에서 트랜스젠더는 아직 사람이 아니다.        



출처:  이성호 국가인권위원장 후보, 성전환자 성별정정신청 당시 성기사진 제출요구 논란 (kukinews.com)


판사심문기일 당일, 어떻게 하고 가야되나 고민이 되었다. 너무 캐쥬얼하게 하는것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화려하게 꾸미고 가기는 싫었다. 대체 내가 왜 그래야 되지?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적당히 수수하면서도 화사한 옷을 입고 갔다. 회사에는 하루 연차를 내고, 떨리는 마음으로 가정법원에 들어가 내가 배정된 법정 문 앞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요건은 다 갖췄으니 기각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앞에서 말한대로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복불복이라 괜시리 긴장이 되었다.  

시간이 되자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들어가자 내 담당 판사가 앉아있었다.

판사는 나한테 이것저것 몇 가지를 물어봤는데,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왜 여성으로 살고싶은지, 하나밖에 외동아들(!)인데 부모님이 허락하셨는지, 남자친구(!) 유무와 결혼 생각은 있는지 등등. 마치 ‘여자 합격’을 위한 면접을 보는 자리 같았다.

정체성에 관해서는 내가 성장환경진술서에 썼던 내용대로 답변을 했다. 나에 대해 가족들도 다 인정을 했고, 현재 남자친구는 없지만 향후 남자를 만나 결혼할 생각도 있다고 대답했다. 아 물론 이건 거짓말이었다. 판사가 원하고 기대하는 전통적인 여성상 기준에 부합해야 할 것 같아서 조금 거짓과 과장을 보탰다.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것만 빼면 여느 평범한 여자들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된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짧은 판사심문이 끝났다. 10분도 안 걸렸던 것 같다. 하긴 판사님도 바쁘실테니.     

심문이 끝나고 나는 또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찾아보니 심문 당일 바로 결과를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심문이 끝나고 다시 또 몇 주의 시간이 흘렀다.

정말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등록부정정 허가문을 받았다!      

주문: 신청인 겸 사건본인 ooo의 가족관계등록부 중 특정등록사항란의 성별란에 기록된 “남”을 “여”(으)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한다.     


이거 하나 받으려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남”“여”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한다니. 이거 한 글자 바꾸려고 이리 고생했다는 말인가. 어쨌든 조마조마 했는데 허가문을 받으니 안심이 되었다. 이제 허가문을 가지고 등록부정정 신청을 하면된다. 허가를 받았으니 앞으로는 그저 시간문제였다. 대법원 전자가족관계등록시스템에 신청하고 또 기다렸다. 이번에는 한 일주일 정도밖에 안걸렸던 것 같다. 처리가 되고나니 가족관계증명서에 기재된 성별이 정말로 “여”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민센터에서 새로운 주민번호가 적힌 신분증을 발급받게 되었다. ‘1’에서 ‘2’로. 새 신분증을 손에 받아들게 되니까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살짝 허탈하기도 했다. 어휴 남들 다 가지고 있는 이 조그만한거 하나 가지려고 그렇게 고생을 했다니.

  

새로운 신분증을 받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법적성별정정 이후에 또 다시 정정해나가야 할 것들이 많았다. 병원, 보험, 은행, 핸드폰과 관련된 업무, 그리고 내가 가입되어있는 여러 단체들에 내가 주민번호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다 알려야 했다. 주민번호가 정정된거 자체는 기쁘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다시 또 바꾸는건 귀찮았다. 은행은 당시 내가 농협을 쓰고 있었는데, 등록되어 있는 주민번호를 변경하려고 했더니 당시 농협이 전산에 접근할 수 없는 기간이라서 당분간은 변경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또 공인인증서는 페기하고 새로 만들었던 상태라 전산이 꼬여서 복잡하게 됐다. 그러니까 어떤 부분은 내가 ‘1’로 되어있고 어떤 부분은 ‘2’로 되어있으니 불일치가 되어서 본인인증이 안되는 것이다. 으악. 이거 때문에 정말 머리가 복잡했다. 결국은 투덜대며 아예 주거래 은행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은행 외에 나머지는 비교적 순탄하게 하나씩 바꿔갈 수 있었다. 사실 면허증이나 여권 등 아직 바꾸지 않은 것도 많다. 나머지는 살면서 필요할때마다 또 하나씩 바꿔가면 될 것 같다. 그리고 법적성별 이외에도 트랜스젠더의 삶에서 정정해나가 할 것이 있다. 바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과 혐오, 그릇된 인식이다. 나는 이것들도 내가 살아가면서 하나씩 정정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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