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서 한 말입니다. 아내의 친구는 아이들이 네다섯 살부터 스스로 샤워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쌍둥이를 매일 샤워시키는 건 적잖은 육아 부담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친구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이들이 혼자 할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쌍둥이는 처음부터 무리 없이 잘 해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입니다. 엄마는 아들에게 욕실이 너무 추우니 하루 정도는 샤워하지 말고 그냥 자라고 다독입니다. 아들은 "샤워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단 말이에요" 하고 화장실 앞에서 엎드려 울먹입니다.
쌍둥이가 어린 나이에 매일 스스로 샤워하면서, 차가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당연한 습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샤워는 몸도 씻겨주지만, 매일 씻는 의식을 통해 기분도 전환되는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믿고 맡기면 뭐든지 부모의 생각보다 훨씬 잘합니다. 아이를 믿고 맡겨 주세요.
ㅣ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 ㅣ
회사 후배 직원이 외동딸 교육 때문에 고민을 토로합니다.
"저희는 맞벌이라서 아이를 직접 돌보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커서, 교육비가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어요."
후배는 아이를 영어 유치원을 포함해서 학원만 서너 개를 보냅니다.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는 학습지 교육도 몇 개를 받다가 아이가 너무 힘들다고 해서 좀 줄였다고 합니다.
후배는 "아이가 수학이 약해서 큰일이에요. 제가 수학과를 나와서 직접 가르쳐 보려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더라고요."라며 걱정합니다.
후배의 아이는 공부에 재능이 있어서 뭐든 잘 따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가 잘하니 더 욕심이 나고,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모두 해주고 싶어 하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 읽혔습니다.
나는 후배가 듣고 싶어 할지는 모르지만 냉정하게 조언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아이를 부모가 직접 가르치는 건 안 좋아요. 부모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어 주는 게 중요해요."
학원이나 학습지로 시달리는 아이에게 부모까지 아이를 가르치면서 채근하거나 실망감을 드러낸다면, 아이는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부모를 ‘지지자’가 아니라 ‘지시자’로 인식합니다.
부모가 지시자가 되면, 아이는'공부'를스스로 해나가야 할 당연한 것 혹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친구'가 아니라, 부모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해야 하는 것, 부모와의 자기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어 줄 때, 아이는 공부가 자신의 몫이라 자각합니다.
ㅣ 감정의 융합 효과를 벗어나라 ㅣ
심리학 용어 중에 '융합 효과'가 있습니다. '융합 효과'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부모의 감정이 아이의 감정이 되고, 아이의 감정이 부모의 감정이 되는 경우입니다.
감정의 경계가 없어지면, 서로의 감정에 기대어 삽니다. 감정의 융합 상태에서는 상대를 위한 말이나 행동도 그 이면에는 자신의 불안이 숨겨져 있습니다. 상대를 통해 나의 감정을 해소하려 합니다. 서로 붙들고 기대어 사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에 혼자 살아갈 잠재력이 봉인됩니다.
부모가 자녀의 숙제를 돌봐줄 때 부모는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게 투사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숙제가 나의 과제가 아니라 부모와 나의 혹은 부모의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아이는 점점 더 부모에게 의지하는 관계로 빠져듭니다. 부모나 아이는 서로에게 얽매인 힘든 삶을 삽니다.
쌍둥이는 이른 나이부터 샤워든 숙제든 모든 걸 스스로 해왔습니다. 대학 입시에서도 진로 선택이나 자기소개서 작성도 모두 부모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 해냈습니다. 자녀가 독립심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는 부모의 양육 태도에 달렸습니다.
생각이 당신 편일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_이유 없는 편안함(노랑검정)
ㅣ 요구보다 모범, 지시보다 지지하기 ㅣ
이런 질문이 예상됩니다. "쌍둥이처럼 알아서 잘한다면 왜 부모가 일일이 간섭하고 가르치겠어요? 우리 아이는 그렇지 못하니 끌고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이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해지자." 아이에게 바라는 모습이 있다면, 나의 삶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아이를 끌어당기지 않을 때, 아이는 보고 들으면서 스스로 따라옵니다.
언제인가 청소년 문제에 대한 TV 방송을 봤습니다. 고등학생 자녀가 공부를 안 하고, 부모의 지원과 기대를 엇나간다는 고민이 있는 가정을 보여줍니다.
이 가정의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골프 방송을 시청하면서, 밖에서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굳은 표정으로 공부에 소홀한 아이를 질책합니다. 그 순간에도 아버지의 시선은 TV로 방송되는 평온한 골프 방송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여가나 취미를 즐기는 건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매번 게으르고 때론 심하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서 자녀에게는 "넌 똑바로 공부해. 네게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지 알아?"라고 말한다면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혹은 "아빠가 이렇게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건, 네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나도 힘들다. 그러니 넌 공부 열심히 해."
이건 극단적인 예이지만, 아마도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라면 공부에 대해 의무감이나 죄책감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도 하고 싶지만, 제 마음대로 공부가 안 돼요.'라고 자책하면서.
아이는 최선을 다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면, 부모의 고충과 헌신을 알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죄책감 혹은 좌절감을 안고 살게 됩니다.
부모로서 가정이나 직장서 감당해야 할 의무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불안이나 불만을 자녀에게 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삶을, 아이에게 모범이 될 정도로 산다면, 아이는 따라옵니다.
아이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억압과 강제는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에게 가장 큰 독입니다. 간섭보다는 간접적인 지원이 좋습니다. 아이에게는 '지시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일지라도 절대적인 '지지자'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