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늦은 밤거리는 짐짓 시끄럽고 화려했다. 염증 같은 도시의 하루 긴 트렌치 롱코트에 중절모를 쓴 그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재빠른 걸음으로 군중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쳐나갔다. 그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제법 키가 큰 편이었다. 그는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안경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기차역 안에는 여러 매장들이 있었고 남자는 한 커피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딸랑. 문에 달아둔 작은 종이 상쾌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문 쪽을 바라본 사람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남자의 입에서 차갑고 마른 소리가 나왔다. 그러고는 중절모를 벗었다. 깊은 눈망울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곧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왔고, 미동도 없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갓 뽑은 커피에서 나오는 진한 향기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그는 한 모금 입에 가져다 된 다음 조금씩 나눠 마셨다. 긴장이 풀어졌는지 그제야 겨우 한 숨을 내쉬었다. 아직 기차를 타려면 30분이나 시간이 남아있었다. 시간 계산을 조금 빨리 하긴 했지만 늦어서 허둥대는 것보다는 일찍 기다리는 편이 더 편했다.
그가 가는 길에 이유는 없었다. 그는 야간행 기차를 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냥 떠나는 것이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도.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으면 그는 이렇게 훌쩍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공간에 가면 잠깐이나마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차는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출발했고 창가 쪽에 앉은 그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밖을 쳐다보았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지쳤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절실했다. 정처도 없이 길을 정한 건 그 때문이었다.
밤하늘은 차가워 보이면서도 별빛 때문인지 따뜻해 보였다.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밤하늘엔 별들이 가득하다. 도시는 밤에도 환한 조명 때문에 이런 풍경을 볼 수없었다. 드문 드문 보이는 가정집의 불빛은 또 얼마나 포근한 느낌인지 그는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열 몇 정거장쯤 지나 남자는 본인이 내려야 할 곳을 찾았다. 기차역에서 나오자 제법 쌀쌀한 밤공기가 그를 맞아주었다. 조용하고 잔잔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남자는 이 곳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디를 가야지 하고 내린 것이 아니라 이쯤에서 내리자 하고 내린 탓이었다. 그는 무작정 불이 비추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가정집에 도착했다. 밤 중 손님은 아무래도 이상하니 목을 가다듬고 조용히 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남자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하룻밤을 묵어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다. 할머니는 아무런 말 없이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아직 먹지 않았다고 대답했고 그만하고 들어오라는 손짓에 그대로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의 집은 그가 어릴 적 자주 갔던 외갓집의 모습과 비슷했다. 여느 시골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집. 그래서 더욱 그의 맘에 들었을지 모른다. 할머니는 금세 한 상을 차려냈다. 흰쌀밥에 갖은 나물반찬과 된장찌개. 남자는 더할 나위 없는 풍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tv를 보았고 그는 옆에서 마치 그녀의 친아들처럼 밥을 먹었다.
"젊은 양반이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 곳까지 왔누."
"원래 도시에서 생활하는데 마음이 복잡하고 머리가 아파서 잠시 여행을 왔습니다. 어디를 가려고 마음먹은 게 아니라서요. 발길 가는 대로 왔지요."
"마음이 복잡하다니, 아직 젊은 게여. 할머니 집에 왔다 생각하고 편히 쉬게."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조용히 상을 물리고는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님 사진인가 봐요."
"영감 사진이야. 못된 양반이지. 나를 두고 먼저 갔거든."
"자녀분들은요."
"1남 1녀인데 바쁘다고 못 본 지 꽤 됐네.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니 잘 살고들 있겄지."
되려 호기심이 일은 것은 남자 쪽이었다. 그 뒤로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고 짧은 시간이지만 할머니에 대해 많은 것들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말끔한 기분으로 일어난 그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방문을 열었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어느 나무에선가 새소리가 들렸고 어제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 보이는 산의 풍경이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할머니는 벌써 일어나신 모양인지 마당에는 밥 냄새가 가득 파져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한번 켜고, 마당 밖으로 나왔다.
"잘 주무셨어요?"
"이제 일어났나 보구먼. 늙으면 도통 잠이 없어. 아침은 별 거 없지만 그냥 먹게나."
"어제도 늦은 시간에 정말 잘 먹었습니다."
"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이구먼."
어느새 그는 낯선 할머니가 익숙한 모습으로 느껴졌다. 어제 처음 봤을 뿐이지만 그의 친할머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렸을 적 할머니 밑에서 자란 그이기에 이 광경이 더 익숙했던 터였다.
"실례가 안된다면 조금만 더 머무르고 싶습니다. 대신 할머님께서 필요하신 일을 도와드리려고요. 전구나 수도 같은 것도 고쳐드릴 수도 있고요."
"적적했는데 잘됐지 뭐, 더 있다 가세나."
남자는 방 안에서 수명이 다해 껌뻑 껌뻑 거리는 전구를 갈기도 하고 농기구 정리를 돕기도 하고 마당을 쓰는 잡다한 일들을 했다. 조금만 뭔가를 하면 곧 점심때가 되고 금방 저녁때가 되곤 하는 것이었다. 도시에서의 삶이 빠듯하게 돌아가는 느낌이라면 이곳은 느리면서도 은근히 빨리빨리 돌아가는 것이 다른 것이었다.
"도시에서 자란 젊은이 같은데 싹싹하고 빠릿빠릿하구먼."
"어렸을 적에 할머니와 함께 살았거든요. 익숙한 광경입니다. 농기구를 정리하는 건 저의 몫이었죠."
"늘 혼자 지냈는데 말동무가 있다는 건 좋은 게로군. 늙은이가 괜스레 주책이지."
"아무 걱정 없이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오랜만이라서 좋습니다. 원래 생활하는 곳에서는 늘 조심하고 생각해서 말하다 보니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잘하지 않거든요."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문제의 시작은 말로부터 시작했다. 단순히 말실수를 했다거나, 말투가 거슬린다거나, 목소리가 별로라거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 큰 문제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그런 걸 목격하다 보니 말하는 것을 점점 줄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말만 잘하지 않아도 문제의 반이 줄어들었다. 내 생각 이상의 것들을 주제넘게 발설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사회에서 얻은 나름의 교훈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시간이 퍽 즐거웠다.
특별한 대화거리가 없더라도 그냥 소소한 일상 거리가 곧 주제가 된다. 가령 눈에 보이는 풍경만 툭하고 내뱉어도 이상하게 길고 긴 대화가 되는 것이었다. 혼자 사는 할머니의 오랜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무작정 타지에 찾아온 낯선 젊은이의 신선함 때문이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5일째 되던 날, 그는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왔던 모습 그대로 돌아갔으나 그의 양 손에는 갖은 짐이 한 보따리나 들려 있었다. 옅은 미소와 함께 왜인지 모를 애틋함이 마름 속에 가득한 채로 남자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긴 채.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