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여름 여행 시드니 한 달 살기
애보리진어로 '천둥 치는 곳'이라는 의미인 '마러브라'는 시드니 센터에서 동남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우스 쿠지' 아래에 있는 지역이다. 1861년 첫 번째 집이 지어진 이후 1870년대 정착민들이 이주하면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시드니에서 본다이나 쿠지 비치보다 더 먼 곳에 위치하는 마러브라 비치는 다른 해변보다 훨씬 한적하다며 친구들이 여러 번 추천해 주었다. 하지만 뉴타운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기에는 루트가 복잡해 시간이 오래 걸려서 미뤄두었다. 그러다 시드니에서의 한 달 살기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새로운 해변에 가보고 싶어 마러브라 비치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서리 힐스, 센테니얼 공원, 사우스 쿠지를 천천히 지나고 나서야 마러브라 해변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한 시간을 넘게 버스에 앉아있는 게 조금 답답했지만 이런 지루함은 바다를 만나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홀리데이 시즌이 모든 끝나고 찾은 해변은 더욱 한적했다. 사람들 한두 명과 갈매기 무리가 오가는 텅텅 비어있는 해변이 다 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날 마러브라 비치의 파도는 나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파도가 아주 강하고 짧게 부서져서 많이 위험했다. 먼 해변으로 온 만큼 바닷물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무섭게 내리꽂는 듯한 파도에 발만 살짝 담가보았다. 이런 바다를 멋지게 즐기는 서퍼들이 부럽기만 했다.
시드니의 다른 해변들처럼 마러브라 해변에도 주변을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본다이 비치의 코스탈 워크를 시작으로 해변에 갈 때마다 해안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탓에 강한 파도가 쉬지 않고 때리는 태평양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나에게는 산책이 바다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 되어주었다.
본다이와 쿠지 코스탈 워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풍경을 바라보며 마러브라 해안을 따라 걸었다. 새해가 지나고 나서 이글이글했던 태양볕도 강도가 약해지고 바람도 조금 선선해졌다. 시드니의 여름도 끝나가는 게 느껴져 조금 아쉬웠지만 산책하기에는 수월해졌다.
여러 모양의 바위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만나는 잔디밭과 작은 벤치는 잠깐 쉬어가기에 완벽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해안가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서 아이스 라테와 빵 한 조각을 먹으며 잠시 쉬다가 마러브라에서 사우스 쿠지 방향으로 더 걸어보기로 했다.
호주는 10여 년 전 워킹 홀리데이로 먼저 왔었다. 10개월을 서호주에서 지내고 남은 두 달 동안 호주를 여행했다. 초반에는 그저 영어를 잘하고 싶었을 뿐 유럽에 비해 역사가 짧고 문화적 유산이 적은 호주에 대해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서호주부터 울룰루(Ululu)를 지나 브리즈번까지 여행하면서 자연의 위대함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는 자연 그대로를 느끼고 즐기며 여행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호주가 얼마나 위험한 땅인가' 혹은 '호주에서 얼마나 쉽게 죽을 수 있는가'라는 주제는 시드니 친구들이 나에게 가십거리처럼 자주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악어, 상어, 각종 독을 지닌 동식물, 척박하고 험악한 땅 등등 도시든 아웃백이든 자연에게 목숨을 빼앗긴 사례들이 아주 다양하고 많았다. 친구들이 농담처럼 웃으며 해준 이야기였지만 호주 사람들이 분명 자연을 두려워하고 그만큼 존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괴하면서도 멋진 바위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그 옆으로는 깊고 푸른 바다가 쉬지 않고 움직이며 파도쳤다. 아름답다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거대한 울룰루 앞에 섰을 때 자연 앞에서 먼지만큼 작은 나의 존재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너무 두려웠지만 동시에 뭔지 모를 감동이 느껴졌다. 울룰루를 처음 봤을 때만큼 놀랍지는 않았지만 한 달 동안 시드니에서 지내는 동안 해안을 따라 걸을 때마다 비슷한 기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를 바라볼 때, 나를 둘러싼 바위의 크기가 가늠도 되지 않을 때 내가 이 거대한 지구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며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런 이유로 계속 걷고 또 걷고 싶었다.
시드니 한 달 살기의 마지막 해변이었던 마러브라를 떠나기가 아쉬워 다른 때보다도 더 걸었다. 3시간이 넘게 햇볕을 쬐며 걸었다. 강한 호주의 햇볕을 가리려고 언제나처럼 선크림을 기본으로 온몸에 바르고 모자와 선글라스도 열심히 썼는데 이날 작은 부분을 챙기지 못했고 이 때문에 며칠 고생했었다.
등이 살짝 드러난 원피스라 친구들에게 등에 선크림을 발라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잊어버렸다. 결과는 역시 화상이었다. 정확히 내 손이 닿지 않은 부분만 빨갛게 화상을 입었다. 알로에 베라와 스킨을 계속 발라도 움직이는 게 힘들 정도로 후끈거렸다. 3~4일 동안은 등에 닿는 옷을 입기 불편할 정도였고 열흘 정도 지나서는 껍질이 벗겨졌다.
파괴된 오존층으로 인해 UV가 아주 강한 호주에서는 피부암이 가장 발생률이 높은 암 중에 하나이다. TV에서 피부암 예방, 검진, 보험에 대한 광고가 항상 나오고 친구들을 매년 피부암 검진을 정기적으로 받고 있다. 작은 점이나 주근깨가 암세포가 될 수 있어 미리 레이저로 제거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미용 목적으로 레이저 시술을 하는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케이스다.
스페인의 태양도 상당히 강하다는 걸 매년 느끼는데 호주의 태양은 스페인의 태양과 비교되지 않았다. 우선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뜨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태양을 쬐고 있으면 금세 따가운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챙이 아주 큰 모자나 우산을 쓰는 걸 우스꽝스럽게 여기는데 호주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그림이다.
등에 화상을 입는 바람에 며칠 고생했지만 마러브라에서 만났던 멋진 풍경들을 떠올려보면 등에 입은 작은 화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을 감고 마러브라를 걸으며 들었던 파도 소리와 강한 햇빛에 피부가 따끔거렸던 느낌을 떠올려 본다.
12월 여름 여행
싱가포르 & 시드니 한 달 살기
바르셀로나의 축축한 겨울이 유난히 싫었던 그 해 12월, 뜨거운 태양을 즐길 수 있는 시드니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비행기로 21시간이 걸리는 시드니를 가는 길에 싱가포르에서 잠시 쉬어갔다. 시드니에서는 가장 힙한 동네인 뉴타운의 에어비엔비에서 한 달을 머물면서 시드니와 그 주변을 여행했다. 시드니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고 그들 덕분에 시드니와 호주를 10년 전에 여행했을 때 보다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머리와 마음이 같이 리프레시되었던 12월의 여름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