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사실상 여행보다는, 여행을 다녀오고 느꼈던 가족, 노인성 치매에 대한 글입니다. 아마 지지부진한 양심고백이 되었으면 되었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 거에요. 밝은 여행 이야기를 기대하셨던 분들이시라면 다음 이야기를 읽어주시면 될 듯 합니다.
출퇴근길, 우리의 시선은 온갖 광고들로 향합니다. 하늘을 수직으로 올려다보지 않는 이상 모든 곳에 광고가 있기 때문이죠. 거의 공해나 마찬가지인 광고 중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오래된 광고가 있습니다. 어떤 책을 홍보하려는 문구였는데요, 징그럽게 느껴질 정도로 싫었어요.
지금 행복하지 않은 자, 모두 유죄!
아니, 출퇴근만으로도 힘든데 행복하기까지 해야 하고 행복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이게 무슨 속 뒤집어지는 소리야? 하필 또 그 광고는 버스정류장마다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써 있어서 눈에 잘 띄었고, 덕분에 버스정류장에 설 때마다 시선을 확실히 못박아 두다시피 했습니다. 그 광고가 너무 싫어서 쌍욕을 한 적이 있을 정도에요. 지나치게 잔인한 문장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문장에 동의하게 될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그것도 태어나 처음으로 효도여행을 다녀온 제주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고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우리 할머니는 말하자면 대장부였어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억척스레 삶을 이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어렵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시고, 스물이 채 되기 전에 어머니까지 여의셨습니다. 일곱 살엔가 남의 집 식모로 들어가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며 자라나셨다고 했습니다. 다 자라 결혼하고 나서는 소작을 짓거나 떡을 만들어 팔고, 사과를 떼다가 팔고 하면서 근근히 생활을 이어 오셨고요. 할아버지는 별로 도움이 안 되었다고 해요. 일을 거의 하지 않으시고 매번 놀기만 하셨다고. 그리고 할머니가 애써서 땅을 사 놓거나 하면 그걸 할머니 몰래 싹 팔아치우시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고요. 할머니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어마무시하게 화를 내면서도 현재의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 쉼없이 일을 하시고 농사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자식들을 보고 나서는 자식들과 함께 생계를 이어나가셨는데, 큰고모는 빨리 시집가고 큰아빠는 외지로 금세 나가버리고, 작은고모와 작은아빠도 외지로 나가버려 우리 아버지만 할머니 옆에 남았어요. 할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은 우리 아버지의 몫이였습니다. 소를 치거나, 소가 없을 땐 소를 대신해서 쟁기를 끌거나 논을 돌보고, 온갖 일을 다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장가도 서른 둘이나 먹어서야 갈 수 있었다고 해요.
제가 갓 태어났을 때도 아버지는 농부였고, 분가하지 않고 할머니 할아버지랑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세 살 이전의 기억이라 전혀 떠오르지 않지만 저는 그 집, 그 동네에서 꽤나 예쁨을 받고 자랐던 모양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효자로 소문난 우리 아버지의 첫째 자식이니 뭐 말할 것도 없었죠. 할머니는 툭하면 나는 ㅇㅇ(아버지 이름)이밖에 없어, 나는 ㅁㅁ(역마살찐년 이름)이가 제일 좋아, 라고 말씀하시며 각별함을 아낌없이 표현하시곤 했습니다.
어릴적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아이들은 애틋한 정이 있다고 하던데, 저의 경우는 그 애틋함이 좀 지나쳤습니다. 어머니보다도 할머니를 더 많이 좋아했어요. 누가 들으면 웃을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잠도 꼭 할머니 옆에서 자고, 밥 먹을 때도 언제나 할머니 옆에 앉아서 먹었습니다. 명절 같을 때 사람들이 많아 상을 두 개 보고, 애기들은 작은 상에 앉아 먹을 때도 나는 꼭 부득불 할머니 옆을 비집고 앉아 먹었어요. 누가 앉아있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가족, 친지 모두가 아예 할머니 옆자리를 비워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스물 아홉 먹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밥 먹을 때, 잘 때 우리 가족들은 늘 제가 외치는 '할머니 옆에!'를 들어야 했습니다.
어제까지 제주에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엄마아빠를 모시고. 인도에 가기 전 효도라도 하고 갈까 싶어 무조건 티켓을 끊었어요. 티켓을 끊고 나서 가자고 우겼습니다. 아버지 회사는 무척 바빠 아버지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지만 환불이 안 된다고 거짓말을 했더니만 어찌저찌 휴가를 내셨습니다. 여행 전날 할머니를 모시러 가서 할머니와 나란히 깻잎, 시금치, 고구마, 꽈리꼬추, 고추, 할머니 옷 몇 벌과 혈압약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푹 잔 다음 날 아침 터미널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출발했어요. 뭔가 틀리지 않았나, 하는 예감은 그때부터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의 가장 맨 처음에 썼듯이, 저는 가족여행이라고는 간 적이 없다. 제가 간 적 없으니 당연히 우리 가족도 간 적이 없고요. 할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를 가기 전 가족과의 추억을 만들고 싶었고, 사실 혼자 놀러 간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특히나 생전 비행기라고는 30년 전 신혼여행 때 왕복으로 딱 두 번 타본 게 전부인 엄마아빠께 제일 죄송했습니다. 할머니는 마을 계로 제주도도 한 번,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 필리핀도 다녀오셨다고 해서 조금 덜 죄송하긴 했지만, 워낙 연세도 많으시고 요즘 자꾸 깜빡깜빡 하셔서 훨씬 불안한 마음이었어요. 인정하기 싫지만 제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이 점점 피부로 느껴졌거든요. 꼭 모시고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과연 우려는 사실이었어요. 할머니는 출발하는 버스부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우리가 제주도를 가는 거냐, 제주도는 30년 전에 가본 게 전부다, 그때는 집 앞에 나무를 가로질러놔서 문을 만들어둔 걸 봤었다 등등 본인의 경험을 레코드처럼 반복해서 들려주셨습니다. 저도 그때마다 아 정말요? 신기하네요, 그랬어요? 등등의 열정적인 반응을 똑같이 되풀이했습니다. 참을성이 무척이나 없는 편인 저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만큼은 잘 들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 아니 착각했어요. 매번 '할머니옆에!'를 외치던 사랑과 열정으로. 그러나 저는 틀렸습니. 스스로를 과대평가했어요.
2박 3일의 여정은 예상보다 짧지 않았습니다. 엄마아빠는 여행을 처음 가는 거라 아무것도 모르셨고 제가 뭘 하자고 하면 만사 시큰둥해 보이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부담을 가질까봐 감정을 크게 표현하지 못하신 거였지만. 어쨌든 계획, 결정, 계획 실패에 대한 우려, 계획이 마음에 안 드실까봐 드는 걱정 등등 모든 게 다 제 몫이였습니다. 심지어 우리 집에서 어설프게나마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뿐이니 운전까지 제 몫이었습니다. 거기다 할머니는 지치지 않으시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셨습니다. 30년 전 제주도에 왔다는 이야기가 아버지가 열 살 때 왔다, 총각 때 왔다, 결혼하고 왔다 등등의 다양한 이야기로 변주되었습니다. 이야기를 고쳐 드려도 소용이 없이 본인의 왜곡된 기억을 고집하셨습니다. 저의 피로는 2박 3일간 점점 쌓여만 갔어요.
여행 중간중간 할머니의 기억에 도움이 될까 해서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드리면, 이런 사진은 언제 찍었는지 언제 우리가 여기에 갔었는지 놀라워하셨습니다. 조금의 좌절감과 절망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즐거워하시니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즐거워하셨던 건 서귀포유람선이었습니다. 유람선을 타는 시간만큼은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본인의 이야기보다 오로지 풍경에 대한 감탄만 말씀하셨습니다. 여행이 끝나고 물었을 때도 유람선이 제일 좋다고 하셨어요. 한 가지 좋은 기억을 남겨드린 건 분명했습니다.
피곤한 와중에 시간은 흘러가긴 했고 어느새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시간이었어요. 제주 공항과 가까워지자 할머니는 조금 초조해 보이시고 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지셨습니다. 왜 이렇게 빨리 걸으시냐는 제 물음에 할머니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옆에서 혹시 버리고 갈까봐 그런다고 툭, 농담을 던지셨습니다. 그런데 제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할머니가 약간 동요하시는 것을 얼핏 본 것 같았어요. 여기서 저는 할머니를 안타깝게 여기고 더 잘 돌봐드리겠다고 다짐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주 솔직히 털어놓을게요.
그때 제게 든 감정은 막막함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할머니를 사랑하고 아끼고 걱정하고, 그만큼이나 사랑하기 때문에 여행비를 헐어 제주까지 갔는데도 이러신다면 도대체 얼마나 뭘 해야 할까 싶었습니다. 저는 분명 못된 손녀가 맞았습니다.
돌아오면서 할머니는 또 제가 못된 손녀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김포공항에서 동네 터미널까지 오는 버스를 탔는데, 원래 김포에서 사셨던 할머니는 그쪽 지리가 바뀐 걸 모르시고 계속 왜 돌아가냐고만 물으셨습니다.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몇번을 말해도 기사가 돈을 더 벌려고 돌아가는 거라고 계속, 계속, 크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버스에서는 조용히 하셔야 한다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분명 정중하게 말한 것 같은데 할머니는 그만 심사가 뒤틀리셨어요. '늙으면 죽어야지' 레파토리가 시작되었고 저는 잠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늙어서 구박이나 당한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참을성이 다 되어버렸거든요.
늙어서 구박이나 당하고. 누가 구박해요? 아 글쎄 늙으면 다 구박이야 그러니까 누가 구박해요. 할머니를. 아 있어. 왜 물어봐. 궁금하니까 그러지. 누가 구박해요. 내가? 아빠가? ... 제주도 모시고 가서 관광하고 돌아다니고 맛있는 거 먹는 게 구박이면 나도 맨날 구박이나 당했으면 좋겠다. ... 왜 구박한다고 느끼세요, 대체.
지지부진한 대화가 잠시 이어졌습니다. 대화가 아니라 제가 할머니를 몰아붙이는 꼴이었습니다. 그런 스스로를 참는 것도 어려웠지만, 제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 했고, 누가 보더라도 제가 최선을 다한 것을 알텐데 할머니가 그러시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 넘실넘실거리다가 결국 넘쳐 흘렀던 겁니다. 결국 할머니는 집에 와서도 저녁을 드시는 둥 마는 둥 하시고 '늙으면 죽어야지' 레파토리를 한 여덟 번 정도 혼자 되뇌고 주무셨습니다. 엄마아빠와 저 모두 참을 수 없어 대체 왜 그러시냐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주무시러 방에 들어가신 후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진지하게 병원을 고려했습니다. 당연히 입원은 아니고 지금의 상태에서 더 악화되지 않을 정도의 약 처방이나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어요. 사실 할머니가 자꾸 깜빡깜빡 하신다는 소리에 병원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자연스러운 노화라며 이 정도의 기억 손실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었거든요. 그래도 아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세네번 하는 정도의 질병이라면, 효도하는 자식들을 다른 곳에 나쁘게 얘기하는 정도라면, 할머니 스스로 생활하시는 데 큰 문제는 없다면 괜찮은 정도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든지 악화될 수 있다고 했었어요. 순식간에 악화될 수도 있다고도요.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할머니는 할머니댁으로 떠나고 안 계셨습니다. 할머니가 쓰셨던 이불이 곱개 개켜져 있는 것을 보면서, 이 모든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 저는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무척이나 절망했습니다. 제가 유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 지금 행복하지 않은 자는 유죄가 맞았습니다. 아무도 제게 유죄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스스로가 스스로를 판단할 때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 시간들을 전부 다 의미없이 흘려보낸 후에야 퍼뜩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꼴이었어요. 5년 전, 아니 3년 전에만 여행을 떠났더라도 우리는 이런 이유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각자의 선택이 부딪혀 다툴지언정, 누군가의 어떤 손실이 나머지 사람들의 참을성을 고갈시켜 결국 모두 기운이 빠지게 되어 다투게 되는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앞으로 저는, 제발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제가 가족 중에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던 할머니가 서서히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더 좋고 행복하고 더 자극적인 것을 가져다가 보여드려도 어쩌면 할머니는 '내가 이런 걸 했었어? 내가 이런 걸 먹었었어? 내가 이런 델 갔었어? 난 몰라, 기억이 안 나'라고 하시며 제게 되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저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은 아니니, 아마 또 할머니께 화를 낼 게 뻔합니다. 잘못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저 힘들게 살아오셨을 뿐인 할머니에게. 그리고 아주 먼 훗날 제 행동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후회만 하고 있겠지요.
그러니 부디,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서는 주변을 한 번만 둘러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무언가 할 수 있을 때를 놓치지 말고 하셨으면 해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다들 알고 있겠지만, 후회는 모든 기회가 지나간 후에서야 찾아오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하게 되는 거니까요. 초조함에 안절부절하면서 후회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입니다.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스스로에게 유죄 판단을 내리는 일, 다른 이들에게는 없길 바랍니다. 부디,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