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버지가 아주 곡절이 많은 인생을 지나 드디어 환갑을 맞이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인생 전부를 당연히 알지는 못하지만 전해들은 이야기만 해도 꽤 매운 맛의 인생이었어요. 분명 고단한 60년이었을 겁니다. 그 고단함엔 제가 저지른 여러가지 불효들도 섞여 있을 것이구요. 때린 사람이 발 뻗고 잘 수는 없는 일이라, 뭐라도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버지 생애 첫 해외여행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만 모시고 갈 수 있나요. 어머니도, 그리고 마침 시간이 넉넉했던 여동생도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제게 가장 친숙한 오키나와로 가기로 했습니다. 안전하면서 편안하고, 충분히 이국적어야 한다는 조건에 모두 걸맞는 곳은 오키나와였어요. 거기다 비행기를 오래 타지 않는다는 장점까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떠나온 여행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는 지금 오키나와 나하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목으로들 짐작하셨겠지만 거하게 싸우고 혼자 카페 겸 바에 와서 술을 마시고 있어요. 아버지랑?아니, 어머니랑 싸웠습니다.
돈도 제가 다 냈고, 코스도 제가 다 짰고, 운전도 제가 다 했고, 사진도 제가 다 찍었고, 심지어 음식 주문까지 제가 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쓰레기같은 기분으로 나와서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에 끝없이 짜증을 내는 중입니다. 따뜻한 라떼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해 봤지만 진정이 안 되었습니다. 원샷에 가깝게 라떼를 마신 후, 눈앞에 즐비하게 세워져 있는 위스키병들의 유혹에 기꺼이 지고 말았습니다. 올드 파 한 잔을 시켜서 홀짝거려도 영 마음이 회복되질 않네요. 결국 블루투스 키보드를 펴서 이렇게 넋두리를 써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대에 부풀어 여행지로 떠나지만 종종 격한 다툼으로 기분을 시원하게 박살내곤 합니다. 이유는 아주 여러가지가 있죠. 겉으로 드러나는 원인을 두 가지로 크게 추려보면 기분이 상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거나(여행 장소가 닫아버리거나 교통수단에 문제가 생기거나 등등) 기분이 상하는 동행과 함께하거나일 겁니다. 그러나 오키나와 앞바다 말미잘 촉수만큼이나 다양할, 온갖 이유들의 원인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면 결국은 기대에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길이 이만큼 막힐 거야, 비행기는 무사히 뜰 거야, 이 곳은 두 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을 거야, 내 동행은 이런 것도 문제없이 먹을 수 있을 거야. 모두 '내 뜻대로 되어 줄 것'이라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격하게 짜증나게도, 그 모든 기대는 언제든 부서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행지에서의 상황은 언제든 어떻게 흘러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 평소의 생활에 비추어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을 겁니다. 차가 막힌다거나 날씨가 안 좋다거나 가려는 식당이 닫았다거나 싶은 건 평소에도 비일비재한 일이죠. 여행지다보니까 크게 확 다가올 뿐입니다. 물론 진짜 특별한 상황을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요. 함께 떠나는 사람과의 갈등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평소에 가만히 그 싹을 내밀고 있었던 부분일 것입니다. 그간 못 알아봤거나 또는 외면해왔던 문제일걸요?
여행이기에 기대를 걸었던 만큼,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은 더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카페에 오기 전, 저는 맥주캔을 이빨로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폭력적인 인간이구나 싶어 매우 좌절했는데요. 이렇게 새로운 스스로의 모습까지 깨닫게 되는 게 여행의 참맛... 그만 투덜거리겠습니다.
아무튼 어머니랑 싸우게 된 건, 평소에도 싫어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금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로 풀어 쓰면 큰 일은 아닙니다. 여행을 준비하는데 매우 애를 쓴 제가 있고, 무엇을 만나든 단점부터 얘기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딜 갈지, 무엇을 먹을지 하나하나 고심하고 동선을 짰던 제게 어머니는 '여기는 이래서 안 좋고, 이건 이래서 맛이 없고' 가감없이 털어놓으십니다. 그런데 하필 이런 모습은, 여행을 준비한 입장에서는 상대방에게서 가장 보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이거든요.
여행을 떠나 오기 전에도, 어머니의 성격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면모 중 위에 언급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삼십년을 살아오면서 정말 많이 싸웠으니까요. 스무 살에 집을 나와 살면서부터는 잘 마주하지 못했던 성격이라 잊어버렸었던 거죠.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이박 삼일을 계속 붙어있으니까 역시 다시 눈에 띄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는 제 모습에, 어머니는 결국 우셨어요.
스스로를 엄청나게 비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족 중 그나마 갓 글자를 읽는 수준의 영어와 일어를 구사하는 건 저뿐이니까요. 해외여행을 해 본 것도 저뿐이고요. 이런 상황에서 호텔에 부모님과 동생을 남겨두고 온 건 정말 비겁한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를 자제할 자신이 없어서 일단 그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와, 쓰고보니 이것조차 비겁하네요. 비겁한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여행이라는 거, 당분간은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비겁함이 불러오는 이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텔로 돌아갈 건데, 돌아가서는 어떤 낯짝으로 어머니를 뵈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환갑을 축하한다며 모시고 온 아버지께는 또 뭐라고 말하죠? 좀 더 참을 걸 싶습니다. 쓸데없는 기대감이 대체 뭐람! 여행이 대체 뭐람!
이 글로부터 벌써 사 년이 흘렀습니다. 키보드를 부술 듯 타자를 쳐서 이 글을 써 놓고도, 분이 안 풀려 씩씩대며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어머니와 화해하고 국제거리를 산책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 밤에는 계속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 잠수함을 타면서 다행히도 괜찮아졌습니다.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 몇 번의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다녀왔습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본인의 문제점을 인지하시고 저를 괴롭게 하시지 않았어요. 저 또한 감정조절에 조금 더 여유로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비교적 아주 성공적으로 여행을 다녀오기까지 했어요. 앞으로도 서로 조심해가며 즐거운 여행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를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