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뜨지 않아서
2018년 2월의 글입니다.
저는 지금 오키나와 케라마 제도의 작은 섬, 자마미에 와 있습니다. 평범한 여행자들은 오키나와 본섬을 둘러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데요. 오키나와 여행이 여섯 번째고 하니, 일반적인 여행자들보다 더 먼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마미 섬 여행은 두 번째입니다. 처음 왔을 때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케라마 제도의 물빛이 궁금해져서 들렀었고요. 이번에 다시 오게 된 건 매년 겨울마다 찾아온다는 혹등고래가 궁금해서였습니다.
인천에서 나하 공항까지 비행기로 온 다음, 나하 공항에서 토마리 항까지 버스로 이동하고, 또 토마리 항에서 자마미 섬까지 배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제법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들어왔는데요. 다행히 섬으로 들어온 첫 날, 바다 상황이 좋아서 고래 관측선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 고래의 모습을 찾아 짧은 항해를 했는데요. 레이더 덕분인지, 선장님 덕분인지 성공적으로 고래를 만났습니다. 바다 위에서 만난 혹등고래는 등부터 꼬리까지밖에 보지 못했음에도 제가 만났던 모든 생명체 중 가장 컸습니다. 케라마 제도는 혹등고래가 새끼를 낳아 안전하게 기르기 위해 머무는 곳이니만큼, 거대한 어미보다는 한참이나 작은 새끼의 자그마한 등지느러미도 볼 수 있었습니다.
고래 얘기를 길게 하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오늘 블루투스 키보드를 펼치고 앉은 이유는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부터 저와 동행은 섬에 갇혀 있습니다.
고래를 만난 후 다음 이틀간, 우리는 천천히 흘러가는 섬에서의 시간을 충분히 만끽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제가 컵라면이나 주전부리로 먼저 아침을 챙겨 먹으며 시간을 보내면, 동행은 느즈막이 눈을 뜹니다. 그러면 점심나절이 됩니다. 작은 방에서 각자 물놀이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챙겨들고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주변에서 문을 연 식당을 찾은 후 섬의 음식으로 든든히 밥을 먹고 털레털레 바닷가로 걸어갑니다.
자마미 항구 가까이 있는 우리의 숙소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아마 비치, 왼쪽으로 가면 후루자마미 비치입니다. 둘 다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걸립니다. 험하지 않은 길인데다가 자연이 아름다워서 전혀 힘들지 않아요. 겨울임에도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나 진초록의 숲을 보면서 걷다 보면 금세 아름다운 바다가 보입니다. 고민하지 않고 외투를 벗은 후 첨벙 뛰어듭니다.
하지만 오래 수영할 수는 없어요. 아무리 남쪽의 바다라고 해도 제법 춥고, 우리에게는 스노클을 제외한 변변한 장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트라도 있다면 조금 더 오래 바다에 머무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아무튼, 아주 짧은 순간이어도 바닷속을 만끽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조금만 들어가도 온갖 물고기들이 반겨주기 때문입니다.
바다 수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합니다. 살짝 달라붙으려고 했던 감기가 온데간데 없어지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몸을 움직였다고 피곤하니 늦은 낮잠을 자기로 합니다. 눈을 붙였다가 깨어나면 저녁을 먹을 시간입니다.
동네 곳곳에는 이자카야가 있는데, 여름이 성수기인 섬이니만큼 겨울에는 아예 닫는 곳들도 여럿 있습니다. 가볍게 걸으며 마음에 드는 이자카야로 들어가 저녁 겸 술 한잔을 기울입니다. 오키나와의 전통주 아와모리는 제법 도수가 높지만, 그윽한 향이 그대로 느껴져 독주를 즐기는 제게는 큰 행복감을 주는 술이에요.
그렇게 배를 채우고 숙소로 돌아옵니다. 하루는 하늘이 맑고 별이 많이 보여서 옥상에 올라가 별 사진을 찍기도 했어요. 방으로 돌아와 나무 바닥 위에 깔려 있는 따뜻하고 폭신한 요에 쓰러지듯 누우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오늘 하루도 잘 보냈구나 싶습니다. 엎드려서 또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졸려우면 잠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 섬을 나가야 하는 날입니다. 어제였죠. 달게 자고 아침 7시 40분쯤 눈을 떴습니다. 지난 밤 쌓여있던 카톡들과 메일들을 읽었더니 8시, 섬 내에 안내방송이 울려퍼졌습니다. 보통은 오하이요 고자이마스, 로 시작해 크게 귀에 들리는 단어 없이 오늘의 날씨를 가볍게 설명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제의 방송은 조금 달랐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졌어요. 일본어 안내가 끝나고 영어 안내가 나왔는데 이때쯤 나는 이미 자마미 섬 홈페이지에 접속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과연. 해상 날씨가 좋지 않아 모든 배가 결항되었다고 떴습니다.
아, 이렇게 되면 본섬에 예약해 둔 숙소는? 가기로 했었던 맛집은? 둘러봐야 할 일정은? 까지 떠올리다가, 숙소 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았습니다. 언제 또 그렇게 계획을 하고 다녔었다고 잠시 불안해진건지, 스스로가 우스웠어요. 얼마 비싸지도 않은 숙소니 환불해주면 다행이고 안 해주면 어쩔 수 없죠, 뭐. 다시 마음의 평온을 찾았습니다.
어차피 체크아웃 후, 아카 섬으로 잠깐 나들이를 가기로 했었습니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케라마 제도를 잇는 배편은 퀸 자마미와 페리 자마미 뿐이지만, 케라마 제도의 세 섬을 잇는 작은 배는 따로 있으니까요. 지난 5월에 왔을 때 그 배를 타고 아카 섬에 갔다가, 아카대교 위에서 매우 경이로운 경험을 했었습니다. 다리에서 아래를 무심코 내려다봤을 뿐인데, 숨을 쉬러 올라오는 바다거북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풍경이 잊혀지질 않아 이번에도 본섬에 가기 전에 그곳에 들르기로 약속했었지요.
본섬을 오가는 배편은 결항되었지만, 자마미 섬과 아카 섬을 잇는 작은 배편은 내해 쪽이어선지 무리 없이 운항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할 일이 하나 정도는 있구나 싶었어요. 전날 미리 매표소에 가서 다음 날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표를 사려 했었는데, 그냥 내일 오라는 답변을 들어 둔 상태였습니다. 어쨌든 11시 45분 배를 타기로 했었으니 11시쯤 숙소를 나와 슈퍼에서 간식거리를 몇 가지 산 후 항구로 갔습니다.
매표소에 도착한 후 우선 오늘 본섬으로 가는 티켓을 내밀며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또다시 그냥 내일 오면 된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아카섬으로 가는 티켓이 두 장 필요하다고 말할 차례입니다. 언제 돌아올거냐고 묻기에 시간표를 살펴보았습니다. 오후 두 시와 다섯 시에 돌아오는 배가 있다. 이미 아카섬에 한번 다녀온 저는 아카섬 자체에는 크게 볼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카대교를 건너 게루마섬까지 가면 모르겠지만, 제법 날씨가 추운지라 그냥 다리나 잠깐 걷고 바다거북이나 보고 밥 먹고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두 시에 돌아오는 표까지 두 장씩, 각각 600엔을 내고 구입한 후 선착장에 주저앉아 배에 시동이 걸리기를 기다렸습니다.
배에는 손님이 셋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마주볼 수 있는 뒷자리에 앉아 혹시나 또 고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넘실거리는 파도들을 샅샅히 둘러봤습니다. 아쉽게도 그런 큰 행운이 우리에게 다시 올 리 없었어요. 배는 예정된 15분 만에 아카섬 항구에 도착했고, 단 세 명의 손님을 내려주고 몇 명의 손님을 태운 후 다시 자마미로 떠났습니다.
아카섬에 남겨진 우리는 항구 바로 앞에서 섬 건너편의 강아지와 사랑에 빠져 매번 바다를 건넜다는 강아지 시로의 동상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바로 아카대교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비현실적인 푸른빛이었고, 그 안에는 바다거북이가 아닐까 싶은 동그란 형체가 몇몇 있었습니다. 하지만 30분을 지켜봐도 거북이는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바위나 해초 따위였던 모양입니다. 5월에 잔뜩 만났던 거북이들은 다 어디로 가 버린 모양이었습니다.
추운 바람을 맞으며 꽁꽁 얼어있던 우리는 거북이를 포기하고 마을을 조금 걷다가 작은 간이식당에서 밥을 먹고 해변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소라 하나하나에 귀를 대 가며 가장 좋은 소리가 나는 소라들을 골랐고, 일행은 산호로 이름을 썼습니다.
오후 2시 45분 배로 자마미 섬으로 돌아오자 정확히 3시였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또 늦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을 먹으러 나섰어요. 전날 눈여겨봤던 식당 카후시도에 갔지만, 건물만 환한 채로 닫았다는 간판이 걸려 있었고 고양이 한 마리가 온몸으로 애교를 떨며 우리를 반겨줬습니다. 한참이나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배가 고파져 그곳을 떠났습니다.
혹시나 문을 열지 않았을까 해서 토라지로에도 가봤는데 거기도 닫아있었어요. 결국 첫날 갔던 마루미야에서 튀긴 두부와 스테이크, 고야 찬푸르를 먹고 슈퍼에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배가 뜰까? 뜨겠지. 혹시 일찍 나가는 배가 있을까, 있으면 그걸 탈까.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바람은 제법 또 거세게 불었고 그 바람의 세기만큼 내일도 섬에 갇히게 되면 어쩌나하는 고민이 커졌습니다.
오늘 아침, 이 글을 쓰는 저는 또 7시 언저리에 반짝 눈을 떴습니다. 8시가 되면 안내방송과 함께 오늘 우리의 거취가 결정되겠지요. 이욘치 게스트하우스에 정이 들기는 했지만 본섬에서 벚꽃을 볼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블루투스 키보드와 빵, 바닐라 티 티백을 들고 방 밖으로 나왔는데 섬에서 보냈던 날들 중 가장 날씨가 좋았습니다. 옥상으로 올라가보니 마침 해가 뜨고 있었습니다.
잠깐 산 너머로 뜨는 일출을 감상하고는, 키보드를 들고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얼추 글을 다 쓰자 8시가 되었고, 어김없이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잘 알아듣기 어려운 안내방송을 포기하고 자마미섬 홈페이지에 들어가봤습니다.
오늘의 퀸 자마미는 결항.
우리가 타야 할 페리 자마미는 정상 운행.
단 하루의 고립을 끝내고, 본섬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척이나 다행이지만, 마음 한 켠에 슬쩍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은 이 아쉬움은 뭘까요. 아무래도 또 자마미에 오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