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서른 셋입니다. 삼십대가 되었다고 한없이 초조해하던 기분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랩니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고 쉴 수 있을 때 쉬고 일할 수 있을 때 일하는 백수 겸 프리랜서의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지난 겨울이 끝날 무렵, 태백산을 찾았습니다.
3월 첫째 주 일요일, 숙소를 출발해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매고 올려다본 태백산은 아름다웠습니다. 나무 끝에 온통 하얗게 눈꽃이 피어 있는 것이 올라가지 않아도 뿌듯할 지경이었어요. 아이젠을 끼고 혼자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겨울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산을 오르니 눈꽃이 나무 끝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어요. 높이가 높아질수록 눈꽃은 내려왔고, 이윽고 고산 지대에 사는 낮은 나무들의 기둥까지 눈에 감싸인 풍경이 보이자 곧 정상이었습니다.
천제단에 앉아 간식 겸 점심으로 싸 온 약과를 조금씩 베어물면서 성취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태백산 정상을 밟았던 건 이번이 세 번째였고, 그 중에서 겨울 태백산을 오르는 건 두 번째였죠. 첫 번째는 내일로 여행을 하던 시절 태백을 지나가다가, 태백이니까 태백산을 올라야지! 하는 대책없는 생각으로 올라간 게 처음이었습니다. 린넨 바지에 캔버스화를 신은 채였습니다. 여름이어서 춥지 않을거라 생각했으나 올라가는 길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꽤 추워서 우비라도 대충 껴 입었어요. 몰골이 영 좋지 않았던지 마주치는 등산객들의 걱정까지 잔뜩 짊어졌습니다. 구름 속에 숨은 천제단 꼭대기를 눈으로만 확인하고 망경사에서 컵라면 하나를 국물까지 싹싹 비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때가 스물 둘이었나 싶어요. 어린 덕분이었는지 준비 없이 올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흔한 초콜릿 하나 없었는데도요. 잘 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태백산이 아무리 험하지 않은 산이라 할지라도 준비는 철저해야 했습니다. 요행히 운이 좋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 사실 위험한 상황에 놓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음 날 저는, 어디 하나 찌뿌둥한 곳이 없었습니다. 운동 잘 하고 난 다음날의 개운함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달랐습니다.
두 번째로 오른 태백산은 겨울의 눈산이었습니다. 그나마 등산화를 신기는 했지만 아이젠이 변변치 않았어요. 신발 전체를 감싸도록 끼우는 아이젠이 아니라 발바닥 중간에 여섯 개의 스파이크만 있는 간단한 도심형 아이젠이었거든요. 올라가는 길은 수월했으나 천제단에서 당골 광장으로 내려오는 길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가파른 눈길을 내려간다는 건, 자칫하면 엉덩방아를 찧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랬다가는 꼬리뼈 골절로 이어지기가 쉬웠습니다. 도심형 아이젠은 큰 도움이 안 됐습니다. 등산객들을 위해 쳐놓은 울타리의 밧줄을 잡고 최선을 다해 조심했습니다. 그러기는 또 처음이어서, 몸을 사리는 스스로에게 조금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긴장해서일까, 그렇게 태백을 내려오고 나니 즉시 온 몸이 아팠습니다. 한쪽 무릎도 사흘 정도는 시큰거렸어요. 겨울의 등산이 쉽지는 않다는 것은 여기저기서 들어 알고 있었으나 직접 겪어보니 역시 달랐습니다. 그 때는 별 생각 없이 산에 다녀왔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다시 돌이켜보니 이상했습니다. 산에 올라도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몸이 아픈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 때의 저는 알게 모르게 나이를 먹은 게 아니었을까요? 물론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스물 두 살의 저는 운동따위 하지 않아도 태백을 아무렇지않게 오르락 내리락 할 줄 아는 건강체였습니다. 스물 일곱의 저는 확실히 나이를 먹은 게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서른 셋은? 운동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식습관이 좋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꽤 많이 받기까지 하는 지금의 저는 괜찮을까요? 결론적으로 괜찮지 않았습니다. 약과를 먹으며 지난 두 번의 산행을 회상하다가 조심조심 산을 내려갔습니다. 겨울에 와 본 경험과 든든한 등산화, 아이젠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 산행보다는 덜 긴장이 되었다고는 해도 완전히 긴장을 풀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무 부상 없이 잘 내려왔어요. 내려오고 나서도 컨디션이 좋았습니다. 간단히 밥을 먹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문제는 다음날부터였어요. 뒷목부터 뻐근해서 종아리까지 뭉쳤습니다. 발목은 그래도 꽤 쓸만한지 멀쩡했지만 그 외의 모든 부분이 아팠습니다. 가장 아픈 곳은 고관절이었습니다. 어딘가 잘못 걸었구나 싶었지만, 동시에 나이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주일간의 뻐근함을 겪고 나니 운동에 대한 강한 열망이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이제 운동하지 않고서는 여행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거야!
그러니까 요즘은 조금만 더 일찍 떠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쉬지 않고 하게 됩니다. 만약에 조금 더 일찍 떠났더라면 어땠을까요?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다음날 걱정 없이 실컷 뛰어놀 수 있지 않았을까요? 천방지축마냥 놀고 나서 맥주 한 잔 하며 주절주절 떠들다가 깊은 잠에 빠져드는 여행자의 삶을 마음껏 누렸겠죠. 솔직히 서른 셋이면 늦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아쉬움이 찾아오는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