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를 어쩔 수 없어서
2017년 1월의 일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가이드로 활발하게 일하던 때였습니다. 가이드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었지만, 많이 쓰지 않으면 그럭저럭 버틸만은 했었어요. 무엇보다 전 직장의 퇴직금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았거든요. 어쨌든 들어오는 일은 전부 받아야 했으므로, 조금 무리한 일정의 무박 2일 기차여행 가이드 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떠나간 여행에서 하필이면 너무나도 무례한 손님들을 만났습니다. 어디서 '가이드를 힘들게 하는 법'이라고 읽고 오신 듯, 이동수단에서도, 여행지에서도 가장 대응하기 힘든 행동들을 하셨습니다. 온갖 괴롭힘을 당하다보니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속에서 헤매다 보니 항공권을 끊게 되었습니다. 네? 핑계가 좋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끊은 항공권은 인천에서 캄보디아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밤에 출발해 새벽에 도착하는 항공권으로, 13만원이 좀 못 되는 가격이었습니다. 심지어 편도였지만, 이 항공권 한 장 끊어놓은 걸로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릴 수 있었습니다. 무박 2일 가이드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살펴보니 편도 한 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당장 다음주에 떠나는 여행이었고, 동남아권 나라로 떠나는 것이니만큼 적당한 준비는 필요했습니다.
최소한 돌아오는 항공권은 끊어두자는 생각으로 여러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았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캄보디아에서 다시 한국으로 오는 것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가까웠고, 육로로 국경을 넘어 베트남 호치민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현지에서 버스표를 구한 뒤, 목바이 국경을 넘어 베트남까지 둘러보고 떤션넛 공항에서 아웃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어놓고, 돌아오는 건 베트남에서 돌아오게 되다니. 배낭여행자들에게는 익숙한 일이겠지만 당시 여행 경험이 많지 않던 제게는 무척 큰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꽤 대담했구나 싶습니다. 딱히 짐도 단단히 싸지 않았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보는 것만이 목표였으므로, 가방에 크메르 문명에 대한 큼지막한 책을 쑤셔넣었습니다. 한국은 한겨울이었지만 그곳은 여름이라기에, 가서 당장 입을 여름옷 한 벌만 대충 개 넣었습니다. 현지의 옷을 사서 입는 게 배낭여행자들 사이에서 유행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겨울 외투는 공항에 맡길 요량으로, 배낭 하나만 매고 집을 나섰습니다.
털레털레 공항에 갔는데, 아니 글쎄, 2주간 외투를 맡기는 비용이 육만 원인 겁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황당한 가격이었습니다. 겨울 외투인지라 아무리 둘둘 말아 꾹꾹 눌러도 배낭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선물 받은 옷이라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겨울마다 매우 요긴하게 입고 있는옷이었기 때문에 버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공항 도착 자체가 조금 늦었어서 빨리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외투 보관 비용이 너무 비싼 것에 이성줄이 끊겨서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 내린 결정은 이랬습니다. 캐리어를 사자.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비행기를 놓치는 게 더 큰 손해인데, 순간의 욱하는 심정에 정신이 나갔었던 거죠. 벗었던 외투를 다시 주워 입고 빠르게 수속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안내 데스크로 가서 제가 아는 유일한 캐리어 브랜드를 외쳤습니다.
샘소나이트 어디 있어요?
언제나 친절한 안내 직원분께서 빠르고 간단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 그 때는 몰랐어요. 샘소나이트 말고도 다양한 캐리어 브랜드가 있고, 가격대는 무척이나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게다가 면세점에서 할인도 골고루 한다는 것과 인터넷 면세점으로 구입하면 이런저런 쿠폰을 먹여서 훨씬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을 다 알았다면 옷을 버리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하지만 옷을 버리는 것도 최선은 아니었을 거에요. 돌아와서 집까지 가는 길에 헐벗은 채로 호달달달 떨어야 했을 테니까요.
여기서 뭐가 제일 가벼워요?
이윽고 샘소나이트 매장에 도착해 직원분께 질문을 던졌더니 정말 가벼운 걸 추천해주셨습니다. 번쩍 들어봤더니 든 것 같지도 않은 무게였고, 모양을 봤을 때도 엄청나게 단단할 것 같았어요. 문제는 무게와 반비례하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죠. 할 수 없이 제일 저렴한 걸 보여달라고 했더니 그것조차 17만원이었습니다. 그 가격을 듣고도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는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래, 어차피 외투 맡겼으면 6만원을 썼을 거였어! 17만원이니까 6만원을 제외하면 11만원에 사는거야! 제 인생에서 가장 맹목적인 순간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탑승 시간을 5분 남겨두고 결제를 끝냈습니다. 캐리어를 끌고 뛰려는데, 캐리어에 든 게 없으니 어쩐지 통통 튀기만 하고 불편한 겁니다. 그래서 캐리어를 번쩍 들고 뛰었습니다. 사람들이 제 앞에서 홍해처럼 갈라졌는데, 아무래도 미친 사람인 줄 알았거나, 힘이 아주 세고 괴팍한 사람인줄 알았을 겁니다. 혹시 그 자리에 계셨던 분이 이 글을 읽어주신다면 오해를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때 들고 뛰었던 21인치 캐리어는 빈 것이었답니다.
빈 캐리어를 끌어안고 열심히 뛰어 124번 게이트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이 아직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놓고 가지 않아서 너무도 다행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이성이 돌아왔는지, 옷을 잘 접어 옷소매로 보자기 싸듯 잘 싸매서 들고 다니다가 현지에서 적당한 가방을 사면 될 일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또 바보짓을 하나 했습니다. 그래도 뭐 어떻습니까. 남의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그랬으면 더 좋았겠지만, 기내용 캐리어도 있는 사람이 된 거죠, 뭐. 캐리어야, 우리 영원히 함께 하자.
그러나 문제의 캐리어는 국경을 넘는 버스에서 오지게 흠집이 나서 바로 중고 캐리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엉망진창으로 흠집은 났지만, 비싼 만큼 튼튼해서 잘 쓰고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