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나 싶어요. 어릴 때부터 자주 기시감을 느꼈거든요? 뭘 하든 처음 하는 것 같지 않게 익숙했고요. 게다가 일곱 살 때부터 살면 살수록 힘든 일이 더 생길 수 있다는 어른스러운 확신을 갖고 지냈습니다. 어쩌면 우울증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어떻게 하면 아이가 생기는지까지도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봤는지…….
제일 신기했던 건 일곱 살 때부터 성인과 비슷한 농도의 감정을 느꼈다는 겁니다. 기쁨, 슬픔, 분노를 지나 사랑까지요. 어린 나이에 누군가를 절절하게 사랑했던 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해요. 살면서 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를 사랑한 적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 존재를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만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건 어딘가 좀 외롭거든요.
아무튼 키 큰 어린이였던 저는 일찍부터 사랑을 알았습니다. 일곱 살에 다니던 연정 유치원에서부터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에 활발한 남자아이였는데, 말은 못 걸어도 내심 그 친구가 저를 바라봐주길 바랐죠. 집에 와서는 그 친구를 많이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세상에 둘만 남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하고……. 중증이었네요.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 나지만요.
그 유치원에서는 매달 그 달에 생일인 어린이들을 모아 생일파티를 해 주었는데요. 선물과 축하를 받고, 맛있는 것을 많이 먹는 호화로운 날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 화려했던 파티에는 기이한 이벤트가 있었는데요. 바로 뽀뽀였습니다.
생일자들을 단상으로 불러 내어 나란히 줄을 세운 후, 평소 좋아하던 친구를 호명하게 합니다. 이름을 듣고 무대로 올라온 친구들은 생일자의 뺨에 뽀뽀를 해야 했습니다. 아주 괴이하기 그지없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상해서, 어디서부터 이상한지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예요. 손뼉 치고 좋아하는 어른들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정말이지, 전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길 기다리면서 그 친구를 홀끔홀끔 바라보았죠. 그 친구도 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봤는지 뭔가 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되더라고요. 이때까지는 굉장히 잘 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앞 순서의, 평소에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친구가 그 남자아이를 부르기 전까지는요.
남자아이는 좀 놀란 기색으로 무대로 올라와 앞 순서의 여자아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내려갔습니다. 대수롭지 않게요.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다른 친구의 뺨에 먼저 뽀뽀를 하다니. 그리고 그 모습을 봐야 하다니. 생각보다 상처가 컸습니다. 슬픔에 빠져있을 새도 없이 바로 제 차례가 되었어요.
마이크 앞에 선 저는 짧지만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아이였지만, 이미 다른 친구의 뺨에 뽀뽀를 한 걸 봤잖아요. 아무래도 다시 불러올릴 수는 없었겠다 싶었어요. 결국 저는 그나마 친했던 다른 남자아이를 불러서 뺨에 뽀뽀를 받았습니다. 더 웃겼던 건, 제가 훨씬 컸기 때문에 저에게 뽀뽀를 하려고 살짝 발돋움을 해야 했다는 겁니다.
저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대신 부른 친구가 발돋움을 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크게 상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뽀뽀는, 드라마에서 나오던 뽀뽀는 이런 게 아니었거든요. 로맨틱한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은 언제나 고개를 살짝 들었어요. 일곱 살이 봐 온 장면은 늘 그랬습니다. 언제나 똑같은 구도로 재생되는 모습만 봐 왔다면, 그 구도가 아닌 이상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죠.
시작이 조금 어긋나서일까요? 그 뒤로 제 연애는 평탄하지는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같은 반에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어요. 뺨이 언제나 사과처럼 붉은 남자애였는데,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고백을 하게 됐습니다. 편지를 써서 전달했고, 그 뒤로 연애를 하게 될 거라고 기대했었던 기억이 나요. 예상 밖에도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요.
성격이 못났다거나, 옷차림이 별로라거나 하는 이유였다면 좌절감이 덜했을 것 같아요. 그건 바꿀 수 있는 영역이니까요. 하지만 키가 큰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다리를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학교에서는 괜찮은 척, 쿨한 척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둘러보니 전부 다 키가 크지 뭐예요. 아빠도 170, 엄마도 173, 세 살 차이 여동생도 또래들보다 훨씬 더 큰 키를 갖고 있었습니다. 며칠간 뚱해 있었습니다. 내가 차인 건, 내게 큰 키를 물려준 엄마와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한참을 볼이 부어 지냈어요.
그 뒤로도 한두 번 키가 크다고 차였어요. 그러니까 상대방은 제가 여성의 일반적인 모습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를 거절한 거죠. 제 성장이 언제 멈출 줄 알고? 미리 자라 두었다가 적당한 때 멈출 수도 있지 않겠어요? 이 생각은 훗날 키가 175를 넘어갈 때 접게 되었지만요. 아무튼 키 때문에 거절당한다는 건 오래도록 생각해도 불합리했어요. 어떤 일반적인 틀에서 머리 하나 더 크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인 건 아닌데 말이에요. 키가 좀 크다고 해서 여성이 아닌 것도 아니고요.
종종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있잖아요. 침대 하나 가져다 놓고 그 침대보다 다리가 길면 잘라 죽이고, 짧으면 늘려 죽였다는 이야기. 침대에서 다리가 삐져나오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알게 된 건 사람마다 마음속에 자기만의 침대를 가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거절을 당할 때마다 ‘나는 또 다리가 잘렸구나’ 하고 괴로워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제 내면 한 구석에도 그 침대가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상이,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침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 무서웠어요. 아니, 여전히 무섭습니다. 서른 셋이 된 지금까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