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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찐년 김짜이 Oct 23. 2021

저 초등학생인데요!

이제 어린이 시절의 이야기가 거의 끝나갑니다. 어린이의 기준은 사람마다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제 기준에서의 어린이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 그때까지만 어린이날 선물을 주셨거든요. 중학생부터는 어린이가 아니라고요. 저도 동의하는 바였습니다. 교복을 입으면 청소년이라는 새로운 범주에 속하게 된다고 생각했어요. 


어린이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해인 6학년이 저물어가고 있었을 즈음입니다. 갑자기 엄빠께서 아파트를 구매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쪽방을 지나 반지하 전세에 이어 드디어 자가를 보유하시게 된 겁니다. 집이 생겼으니 당연히 저희 가족은 이사를 하게 되었어요.


살면서 단 두 번의 이사를 겪었으므로, 심지어 그중 한 번은 자아가 확립되기 전이었으므로 저에게 이사는 엄청나게 큰 일이었습니다. 집을 옮기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학교를 옮겨야 하고, 그동안 친했었던 친구들과도 멀어져야 하는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무척 걱정하자 부모님께서는 계속 지금 학교에 다니는 방법도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버스를 한 번만 타면 학교까지 갈 수 있다고요. 마침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새 동네에서 옛 동네에 있는 학교까지는 대략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온갖 정장 차림의 어른들과 교복 차림의 청소년들 사이에 끼어 타기가 복잡하고 힘들었지만 견딜 만은 했습니다. 키가 커서 숨이 확보되었기 때문이었을지도요. 그럭저럭 무사히 등하교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제가 원치 않던 일이 일어납니다.


여느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버스에 타서 천 원을 넣었어요. 그때 제 기억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등학생 버스비는 사백 원인가 그랬고, 중고등학생 요금은 팔백 원이었어요. 천 원을 내면 얼마간의 동전이 나와야 하는데 그날은 버스 기사님이 달칵, 달칵, 두 번 버튼을 누르시는 겁니다. 거스름돈 받는 곳으로 이백 원만 떨어졌고요.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거스름돈이 이백 원만 나왔지? 그건……. 그건 고등학생 요금인데? 나는 초등학생이고? 이게 무슨 일이지? 이백 원만 가지고는 퇴교해서 돌아올 수가 없는데?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기사님께 외쳤습니다.


저 초등학생인데요!


그때서야 기사님이 고개를 돌려 제 얼굴을 보셨습니다. 그러더니 대뜸 외치셨습니다.


아, 말을 해야지!

달칵달칵달칵달칵, 네 번의 백원이 더 눌리고 백 원짜리 네 개가 거스름돈 받는 오목한 곳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찾아온 엄청난 안도감이 아직도 기억나요. 짧은 순간에 집에 걸어갈 걱정까지 했었기 때문에 더 마음이 놓였어요. 황급히 사백 원을 주워 주머니에 넣고는 무사히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 손잡이를 잡고 섰습니다. 네, 어른들이 잡는 그 손잡이요.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 손잡이가 편안했거든요. 이미 키가 170에 가까웠기 때문이에요. 6학년 생활기록부를 나중에 확인하니 169.9cm였더라고요.


버스는 덜컹거리며 출발했고 몸을 흔들며 실려가다 보니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저는 초등학생인데 왜 고등학생 거스름돈을 받았는지에 대해서요. 기사 아저씨가 호통을 치셨기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있는 상황이어서일까요? 저는 꽤 슬펐습니다. 제 몸뚱이가 저랑은 안 맞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내 안의 영혼과 사회적 지위는 분명히 초등학생인데 내 몸은 옆에 서 있는 고등학생 언니보다 크지 않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겉모습이 그렇게 중요할까? 나는 이미 충분히 큰 키인데 이 키라는 건 언제까지 자라나는 걸까? 생리를 하면 멈춘다는데 언제쯤 생리가 시작될까? 왜 사람들에게는 본질을 보는 능력이 없을까.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버스는 속절없이 달릴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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