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저의 유일한 취미는 책 읽기였습니다. 그 외에는 별로 좋아하는 것도, 딱히 싫어하는 것도 없었어요. 그랬던 제게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좀 유별난 친구가 저를 끌고 ‘서울 코믹월드’에 간 겁니다. 가장 큰 만화 행사였죠. 수도권 주거도시에서 조용히 살았던 제게 너무나도 큰 자극이었어요. 더 말할 것도 없이 만화의 세계로 퐁당 빠졌습니다.
당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첫째는 만화를 그냥 좋아하고 즐기는 부류였고, 둘째는 적극적인 태도로 만화 속에 뛰어드는 부류였죠. 만화 자체를 즐기는 친구들은 만화를 읽고 감상 정도를 나누는 것에서 그치지만, 만화 속에 뛰어드는 친구들은 만화를 주제로 다양한 활동을 펼칩니다. 그들은 만화 캐릭터와 스토리를 재해석해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나가 만화나 소설을 펴내거나, 만화 속 주인공들의 옷을 만들어 입는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등 만화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깁니다.
저는 만화 속에 뛰어드는 부류가 되었습니다. 코스프레의 방식으로요. 그나마 좀 할 줄 아는 글쓰기를 십분 발휘해서 2차 창작을 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코믹월드에서 제 눈에 딱 들어왔던 건 수많은 코스튬 플레이어들이었습니다. 각자 가장 좋아하는, 또는 잘 소화할 수 있는 만화 캐릭터의 의상을 입고 철저한 캐릭터 해석을 거쳐 완벽한 포즈를 선보이는 그들에게 엄청난 컬처쇼크를 받았었어요. 그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 싶었습니다.
학교로 돌아와서 당장 만화 좋아하는 친구들을 수소문했습니다. 제게 큰 충격이었던 코스프레를,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다만 직접 실행하거나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던지라 조용히 지냈던 거죠. 사람도 얼추 모았겠다, 그 이후로 저는 폭주기관차가 되었습니다. 교무실을 찾아가 동아리 활동 규정에 대해 묻고,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면서 인원을 모으고, 원단 살 돈을 위해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동아리를 설립하고, 부원들과 함께 회의를 해 함께 코스프레할 만화를 정하고, 옷을 만들 원단을 떼러 동대문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청소년의 체력은 정말 무서울 정도예요. 어떻게 그렇게 큰 에너지가 있었는지, 그 모든 걸 다 하면서도 심지어 꽤 성공적으로 해냅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코스프레는 계속되었어요.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으니 만화 동아리에 들어갈 수는 없었고, 대신 관심 있는 친구들을 모아 창작 캐릭터 코스프레를 했었습니다. 즐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팀 코스프레에서는 한 번도 여자 캐릭터가 되어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키 때문이었죠. 그때 저희가 고려했던 모든 만화의 여자 캐릭터는 키가 작았어요. 아무리 크다고 해도 가장 작은 남자 캐릭터를 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예외가 있긴 했죠. 남자 캐릭터가 어린이라거나, 여자 캐릭터가 다른 종족이라거나 할 때요. 만화 속 캐릭터들을 최대한 원작과 가깝게 구현하는 것이 제가 했던 코스프레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저는 기꺼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연히 나는 남자 캐릭터지!
딴에는 호쾌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매력 있는 여자 주인공의 옷을 입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 시작한 연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작은 건 평범한 일이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커 버리면 예외적인 일이므로 무대의 균형이 깨지는 것 같았달까요. 여자 역할을 맡고 싶은 제 마음을 드러내면 모두가 곤란해할 것 같았어요.
혹시라도 누군가 진짜 제 마음을 묻기라도 할까 봐 쾌활한 척, 진짜 이 역할을 하고 싶은 척 먼저 남자 캐릭터를 골랐어요. 주인공을 신포도 취급하면서, 맡게 된 남자 캐릭터의 매력을 억지로 찾아내가면서. 마음보다 몸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게 마냥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뭐, 어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