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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찐년 김짜이 Oct 24. 2021

역시 그때  최홍만 꿀밤을 꽂아줬어야

후회가 적은 삶을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해보고 후회, 안 해보고 후회면 언제나 해보는 쪽을 택해요. 덕분에 무언가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물론 인생사가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기 때문에 후회를 안 할 수는 없는데요. 스스로가 저질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멍청한 잘못부터 손톱만 한 실수까지, 머리통을 두드리며 대체 왜 그랬냐고 외칠 일들이 적지는 않네요.


후회의 다양함만큼이나 찾아오는 감정도 여러 가지입니다. 허탈함, 씁쓸함처럼 본인에게 향하는 감정이 있는 반면, 짜증과 분노가 거칠게 터지기도 하죠. 제 후회가 불러일으키는 감정 중 가장 강한 감정은 분노인데요. 제게 무례하게 굴었던 사람들에게 제때 화를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냈어야 할 화를 뒤늦게 내면서 땅을 치는 거죠. 이미 소용이 없지만, 대나무밭에 외치는 심정으로 여기에 적어봅니다.


와, 시발, 존나 크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농담하지 말라고요? 저도 제 말이 농담이었으면 좋겠네요. 본인의 목소리가 작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아니면 제 청력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남의 외모를 판단하는 것도 모자라 그 자리에서 외쳐버리다니. 욕까지 섞어서요.


비슷한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고, 공교롭게도 모두 남자였습니다. 미간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보면 청소년부터 대학생으로 보이는 어른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남자들이 빈정거리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거듭 공교롭게도 저보다 큰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이라도 어렸다면 어린이니까, 하고 넘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제게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분명 어떤 게 실례인지 알만한 나이대였어요. 오히려 어린이들은 제게 말을 뱉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또는 활기차게 질문을 던집니다. 키가 몇인지, 어떻게 그렇게 키가 자라났는지, 엄마 말을 잘 들으면 키가 클 수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마음속으로야 남의 외모를 판단할 수도 있죠. 그런데 표현까지 하다니요. 듣는 사람의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 무례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요? 남의 외모에 특이한 지점이 있다고 해서 다짜고짜 욕을 뱉을 수 있는 만용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요? 제가 격투기에 능하면서 이성이라곤 없는 사람이라 갑자기 주먹을 얼굴에 꽂아버리면 어쩌려고요.


가끔 가만히 서 있는 상황에서 제게 스윽 다가와 키를 재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딴에는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뒤에서 스스로의 키를 제 에다 대고 재 보는 거예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저로서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례함이라,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저는 벙 찐 채로 그 자리에 멈춰 서곤 했습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아무 생각도 안 나잖아요. 문제의 사람들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이 드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한없이 무력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쌍욕으로 되받아쳐주거나 하다못해 정강이라도 걷어찼어야 했을까요? 한때 최홍만이 링 위에서 그랬듯이 큰 키를 이용한 꿀밤이라도 쥐어박아야 했던 건 아닐까, 늘 후회했습니다.


제일 슬픈 건 한참 분노를 뿜어내고 나면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거였어요. 어쨌든 그들은 보통 다수였고, 저는 혼자이거나 여자인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가 반격을 한다면 상황이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알고 있었겠죠. 본인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걸요. 비겁하게시리.


다행히도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때보다 인상이 강해져서인지 무례한 일을 겪지는 않습니다. 유감스러운 건 그때 겪었던 불쾌함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겁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요. 사건들이 떠오를 때, 어렸을 때만큼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누군가에게는 비슷한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을 거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역시 그때 최홍만 꿀밤을 꽂아줬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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