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마살찐년 김짜이 Oct 24. 2021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한동안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파란색이었다가, 보라색이었다가, 핫핑크였다가, 다시 물이 빠져서 불그스름한 노란색이 되느라고 머릿결이 엉망진창으로 상했었어요. 머리를 감을 때마다 손가락에 걸려서 꽤나 거추장스러웠습니다. 결국 싹둑 잘라버렸는데요. 씻기는 수월해졌지만, 공중 화장실에 가는 건 약간 곤란해졌습니다.


여자 화장실에 갈 때마다, 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바닥을 바라보고요. 평생 여자 화장실만 이용했다는 듯 능청스럽게 굴어야 해요. 당연히 평생 여자 화장실만 이용했지만요. 가끔은 일부러 높은 목소리로 헛기침을 하기도 합니다.


무슨 변태 같은 소리를 하고 있냐고요? 오해를 사고 싶지 않거든요. 숏컷을 해 버린 이후로 저를 보고 놀라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왜 놀라시는지 처음에는 몰랐는데, 어떤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이전에도 한번 숏컷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 여행을 위한 나름의 준비였는데요. 짧은 머리를 하고 친구들과 백화점을 갔다가 화장실 앞에 줄을 서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차례를 기다리는데 뒤에서 갑자기 저를 향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자 화장실은 저긴데.


뒤를 돌아보니 중년 여성이었어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거친 소리를 해 버렸습니다. 제가 뭐라고 내뱉자 그분은 깜짝 놀라시더니 사과를 하시더라고요. 기분이 너무 상해서 사과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그 앞에 서서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도대체 남자라고 판단하신 이유가 뭘까요? 확신을 했으니 말을 걸었을 텐데, 판단을 번복하고 사과를 하신 건 또 무엇 때문일까요?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서 잠깐 스스로를 점검했습니다. 남자만큼 짧은 숏컷. 오해할 수 있죠. 보통 대부분의 남자들은 짧은 머리를 하고 있으니까요. 남자 사이즈의 검정 외투, 이것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남자 옷이 맞으니까요. 하지만 여성복은 길이가 너무 짧은걸요. 그래도 짧은 청반바지를 입고 그 안에 검정 스타킹을 신었는데 이걸 보면 여자인 걸 알 수 있지 않나요?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을 굳이 구분하고 있는 제가 좀 우스웠어요. 키로만 구분한다면 저는 남자의 키가 맞고,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옷차림으로 뒤돌아 서 있으면 남자로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는걸요. 외양이나 옷차림으로 성별을 구분 지으려고 하는 건 너무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잖아요.


그리고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니 여성분들이 저를 보고 기겁을 하시는 이유도 알 것 같았습니다. 남자 화장실에 여자가 잘못 들어간다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날 확률이 높습니다. 아직은 특별한 사례가 없으니까요. 반대로 여자 화장실 안에 남자가 있었다고 하면 그 화장실은 당분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리죠. 우리는 너무 많은 나쁜 일들을 겪었고, 앞으로도 안전하리라는 보장 또한 없으니까요.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여자 화장실에서 저를 보고 놀라시는 분들을 원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남자가 아니지만, 진짜 남자가 들어온다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긴 하니까요. 충분히 무섭게 느껴질 만하죠. 저 또한 그 기분을 잘 알고 있는걸요.

이전 12화 역시 그때 최홍만 꿀밤을 꽂아줬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