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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Jan 01. 2019

04. 내가 다시는 구글 날씨를 믿나봐라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시절, 1년 정도 홍콩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홍콩은 정말 일기예보가 지지리도 맞지 않는 도시였는데 가장 정확하다는 날씨 어플도 틀리기 일쑤였다. '우리나라 기상청이 일기예보를 잘하는 거였나' 생각할 정도였다면 믿겠는가. 하루는 버스에서 막 내렸는데 내가 있는 곳에 곧 소나기가 온다는 게 아닌가. 우산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했지만 결국 몇 시간이 지나도 비는커녕 햇빛만 쨍쨍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나도 다른 로컬 친구들처럼 핸드폰에 깔아 둔 날씨 어플을 들여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때의 습관 때문일까. 나는 여행할 때도 날씨를 확인하는 일이 잘 없었고 이번 여행에서도 날씨를 확인하는 일은 손에 꼽았다. 그렇기에 내가 다음 목적지인 리스본의 날씨를 포르투를 떠나기 전날에야 알게 된 것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 물론 내가 게을러서 일수도 있다.  


"보셨어요? 리스본에 계속 비 온다던데."


다른 여행자의 말에 황급히 검색해 본 리스본의 날씨는 온통 비였다. 차라리 포르투에 더 머물다가 리스본으로 갈까 싶었지만 리스본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전역의 날씨가 며칠간 비로 가득했다.


호카곶에서 만날 수 있는 대서양


사실 내가 리스본 일정 중 가장 기대했던 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는 호카곶 방문이었다. 리스본에서 2시간 남짓 떨어진 이 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더욱 유명했다. 하지만 호카곶의 날씨 역시 리스본과 마찬가지로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비, 비, 비, 비, 비…. 한참을 구름과 비뿐인 일기예보를 들여다보며 고민했지만 사실 결론은 하나였다. 좋아, 비가 가장 적게 오는 날 호카곶을 가자.


금요일, 비

토요일, 뇌우     


'토요일은 뇌우면 도대체 비가 얼마나 온다는 거야? 그래, 금요일에 호카곶을 가자. 그리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숙소에서 뒹굴 거려야지.'

이게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세운 나의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일기예보는 역시 한국이던, 홍콩이던, 포르투갈이던 믿는 게 아니었다.       



비 내리는 페나성


“비가 이 정도로 올 줄이야.”


분명 신트라로 향하는 기차를 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하늘에서는 귀여운 이슬비만이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 정도면 돌아다닐 만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신트라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고 페나성에 도착하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은 또 얼마나 강한지 우산이 뒤집어지는 일은 예사였다. 자욱하게 낀 안개에 신트라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당장의 비를 피하기 위해 동행과 함께 허탈하게 웃으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비를 피해 성 내부로 들어온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아마도 한적했을 페나성 내부는 생각보다 세찬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온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마냥 성 내부를 한줄로 줄을 서서 관람해야 할 정도였다. 장난감 궁전같이 생긴 독특한 외형으로 유명한 페나성이었으나 세찬 빗줄기와 강한 비바람 때문에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성 외부를 둘러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듯 했다.


‘날씨가 좋았다면 성 내부에는 몇 사람 없었을 텐데…. 아, 돈 아까워. 신트라까지 오는 원데이 티켓이 얼마였더라. 16유로였지? 거기에 페나성 입장료 14유로까지. 무려 30유로나 썼는데 이렇게 성 내부만 구경하고 있어야 한다니.'


투덜거리며 성 내부를 구경하던 도중 밖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모든 여행자들이 놀란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맙소사, 천둥이다. 아니, 이 정도면 일기예보에 '뇌우'라고 표시해둬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다시는, 구글 날씨를 믿나 봐라.      


페나성을 떠나기 전

성 내부를 한바퀴 다 돌고 카페에서 따뜻한 핫 초콜릿을 마시며 몸까지 녹였음에도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페나성 입장료는 비쌌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쳤고, 하늘은 흐렸다. 최악이었다.     

“저는 신발이 젖어서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아, 정말요?”

“네. 날씨도 이런데 같이 리스본으로 돌아가서 저녁 먹는 건 어때요?”

한참을 빗속에서 덜덜 떨다가 탄 버스 안에서 동행은 리스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떻게 하지. 나도 리스본으로 돌아갈까. 너무 춥고 힘든데…. 하지만 호카곶을 보고 싶은 걸?'


리스본이냐, 호카곶이냐.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맹렬히 충돌했다.    


“이 정도 날씨면 호카곶은 바람이 더 미친 듯이 불지 않을까요? 친구가 평소에도 호카곶은 바다 근처라 바람이 장난 아니래요.”


동행의 말은 설득력있었다. 평소에도 바람이 세다는데 비가 이렇게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오늘은 어떻겠는가. 그래, 이 날씨에 호카곶을 가는 건 미친 짓이야. 그리고 '세상의 끝, 호카곶'은 무슨. 지구는 둥근데 무슨 세상의 끝이야? 리스본에 가서 맛있는 거나 먹어야지.


“좋아요. 리스본에서 맛있는 거 먹어요, 우리!”

 

얼마나 지났을까.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뚫고 버스가 신트라 기차역에 멈춰 섰다. 리스본행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0여분. 우리는 마그넷을 사기 위해 기차역 근처에 있던 기념품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리스본행 기차를 타기 위해 다시 가게에서 나왔을 땐 놀랍게도, 하루 종일 내리던 비가 그쳐있었다. 가게 안에 있던 단 몇 분 만에 말이다.

리스본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내가 동행에게 허겁지겁 작별인사를 하고, 곧 출발하려는 호카곶행 버스에 올라탄 것 역시 단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놀라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오른 호카곶행 버스 안에서 나는 낯익은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리스본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나에게 이번 역이 리스본이 맞는지 물어보던 중국인 친구였다. 스쳐가는 인연인 줄 알았는데 스쳐가는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안녕, 우리 리스본으로 오는 기차에서 만난 적 있지 않아?”


나는 영화에 나올법한 대사를 하며 말을 걸었고, 그녀 역시 나를 기억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같이 호카곶을 둘러보기로 결정했고 비가 얼마나 내릴지 걱정하며 계속해서 창밖을 확인했다. 그런데 사실 버스에 올라타 그 친구의 얼굴을 보았던 그 순간, 나는 호카곶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려도 별 상관없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비가 내리더라도 함께 할 사람이 생겼으니까.


걱정이 무색하게도 호카곶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점점 밝아졌다. 마침내 호카곶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날 처음으로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We are lucky!"


이 정도로 좋은 날씨는 정말 기대도 안했는데…. 눈앞에 넓게 펼쳐진 대서양을 오늘은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햇빛이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Where the land ends and sea begins.’     


아까까지만 해도 지구는 둥근데 무슨 세상이 끝이냐며 비웃었던 문장이 괜히 있어보이게 느껴진다. 역시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다. 리스본에서 나를 괴롭혔던 구글의 일기예보만큼이나 말이다.   

   

아, 심지어 뇌우가 내릴 거라던 토요일은 완전 쨍쨍했다. 그렇게 햇살이 강할 수가 없었다니까.     

내가, 다시는, 구글 날씨를 믿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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