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뿌리개 하나 사면 어때요?

궁극의 물뿌리개를 찾아서

by 우지경

창문을 활짝 열어 집 안에 바람을 들인다. 수도꼭지를 틀어 민트색 물뿌리개에 물을 채운다. 물의 무게를 느끼며 반려 식물에게 다가간다. 사촌 언니에게 들은 말, “식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데.”를 속으로 되뇌며.


식물 앞에 선 나는 급하게 물을 주지 않는다. 화분의 겉흙의 상태를 살핀 다음 검지 손가락을 두 마디 정도 푹 찔러 넣어 흙이 건조하다 싶으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듯 물뿌리개를 빙 둘러 골고루 듬뿍 물을 준다. 그리곤 골골골 흙 사이로 물이 흘러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듣기 좋은 소리다. 첫 번째는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는 소리.


이런 아침을 보내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 그동안 말려 죽이고, 익사시킨 식물이 여럿이다. 과도한 관심으로 넘치는 애정으로 물을 주고 또 준 탓에 나는 자꾸 연쇄 식물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식물을 집에 들었다. 크고 작은 식물들이 내 곁에서 뿜어내는 초록 기운이 좋았기에 포가하려야 포기할 수 없었다. 꾸준히 식물을 키우며 알게 된 것이 3가지 있다.


1. 물, 햇볕, 바람. 식물에게 좋은 3가지는 사람에게도 좋다. (사람의 경우 물을 술로 바꿔도 적용된다.)

2. 물 주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인간에게 과음이 위험하듯, 식물에게 과습은 치명적이다.

3. 화분에 물을 잘 주려면 제대로 된 물뿌리개가 하나는 필요하다.

식물 초보 시절, 스투키, 아레카 야자, 테이블 야자, 싱고니움, 여인초와 함께 살 때만 해도 커다란 컵에 물을 담아 화분에 주곤 했다. 몬스테라, 홍콩야자, 팔손이, 보스턴 고사리, 스파티필름, 산세베리아, 문샤인 산세베리아, 스킨답서스, 고무나무, 박쥐란 등 반려 식물이 점점 늘어나자 물뿌리개가 필요했다. 이왕이면 그립감이 좋고 예뻐서 식물에 물을 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물뿌리개를 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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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모던하우스에서 귀여운 화이트 물뿌리개를 발견했다. 화이트 성애자인 나는 흰색 물건을 살 때 형광 기나 노란기 없는 오프 화이트색을 선호하는데 오프 화이트에 가까운 색이었다 게다가 노즐 모양이 직선으로 올곧게 뻗어있고, 곡선을 그리는 손잡이 디자인이 제법 근사했다. 가격은 100원 차이로 만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9,900. 고민할 것도 없이 집에 데려왔다. ( 비슷한 디자인으로는 따뜻한 아이보리색과 골드빛 손잡이가 우아한 조화를 이루는 이케아의 바텡크라세 물뿌리개도 있다.)


컵으로 물을 주다 힘 조절을 잘 못하면 물이 퍽 쏟아지곤 했는데, 물뿌리개를 쓰니 물줄기 조절이 한결 쉬웠다. 물뿌리개에서 나오는 가는 물줄기는 마치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 물줄기 같았다. 그동안 나의 식물 물주기는 주둥이가 투박한 전기 주전자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린 것과 같았구나 하는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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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렇게 우아한 물뿌리개도 있어?"

그러던 어느 날, 도산공원 옆 편집숍 퀸 마마 마켓에서 하우즈 워터링 캔(Watering can)을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민트색, 레몬색, 코발트블루, 그린 등 다채로운 색과 클래식한 디자인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자태에 반해 한참을 바라보았다.


하우즈(HAWS), 넌 누구냐? 검색을 해 보았다. 1886년 가드닝의 나라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된 워터링 캔 브랜드였다.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손으로 만들어 물줄기를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다고. 물뿌리개가 영어로 워터링 캔이라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살까? 말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에 드는 색과 디자인을 고르고 있었다. 내게는 이미 물뿌리개가 있는데. 나는 색색의 물뿌리개 앞을 서성이며 필요와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식물과 함께 사는 집에 필요한 물조리개 수는 몇 개인가? 거실에 하나, 서재에 하나? 양철 초록색은 내 서재에 두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데 집에 물뿌리개 2개가 필요해? 아니지, 이건 욕망이야. 욕망. 머리로는 욕망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내 손은 물뿌리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만지작만지작.


'에잇, 이 돈이면 맥주가 몇 캔이야.' 하며 과감하게(?) 돌아섰다. 맥주 환산법은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했던 비싼 물건을 사고 싶은 소비욕이 폭발할 때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나만의 응급처치 방법이다. 대신 남몰래 다짐했다. 런던에서 하우즈 양철 워터링 캔을 다시 만나면 여행 가방에 고이 담아오겠다고.


하지만 그 후로 나는 쭉 런던에 가지 못했다. 그래도 식물은 꾸준히 키웠다. 이 식물이 잘 크면 저 식물을 키워보고 싶어서 새로운 식물을 집에 들이고, 이 식물이 죽으면 그 빈자리가 허전해서 또 새로운 식물을 들였다. 나의 식물은 20개에서 30개, 40개, 50개...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한데, 물을 먹여 살려야 할 반려 식물이 늘다 보니 물 주는 시간도 길어졌다. 1리터도 안 되는 물뿌리개는 턱 없이 작았다. 물뿌리개가 작다 보니 식물에 물을 주는 날은 화장실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며 물을 받아야 했다. 한번 받은 물로 여러 식물에게 물을 주려면, 더 큰 물뿌리개가 필요했다. 기뻤다. 드디어 물뿌리개가 필요한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


그날 이후 나는 궁극의 물뿌리개를 찾아 홀로 온라인 쇼핑몰을 유영했다. 조건은 4가지.

1. 용량이 넉넉할 것.

2. 가벼울 것.

3. 사용하지 않을 때도 기분 좋게 진열해 둘 수 있을 만큼 선이 예쁠 것.

4.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을 것.


생각보다 거실에 작품처럼 진열해 둘 만큼 아름다운 물조리개가 많았다. 문제는 용량과 가격이었다. 이케아를 제외하면 위도가 높은 나라(이를테면 북유럽)에서 만들어진 물건일수록 가격이 높았다. 펌 디자인의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 하나의 조각 작품 같은 올브 워터 저그나 AYTM의 비베로 워터링 캔은 용량이 1.5리터인데도 10만 원이 넘었다. 10만 원이면 편의점에서 1만 원에 4캔 하는 맥주가 40캔 아닌가. 휴.


실용적이면서도 근사한 디자인의 물뿌리개를 저렴한 가격에 사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매거진 취재차 서울식물원에 갔다. 코로나로 문을 닫은 사이 몰라보게 자랐다는 열대 식물들 사이를 누비고 난 후 기념품 숍에서 민트색 물뿌리개와 조우했다. 엘호 브뤼셀 워터링 캔 1.8리터였다. 실물의 색과 실루엣이 온라인으로 보는 것보다 예뻤다. 1.8 리터지만 가벼운 플라스틱이라 물을 가득 채워도 그리 무거울 것 같지는 않았다. 손잡이의 그립감도 괜찮았다. 그날 난 민트색 엘호 브뤼셀 워터링 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 이후 녀석은 늘 서재 한편에 식물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내가 식물에 물을 줄 때다 나를 돕는 든든한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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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코로나가 끝난 어느 맑은 날, 런던행 비행기에 오른다. 런던에서는 아름다운 식물원을 실컷 둘러본다. 여행의 끝자락 어느 식물원 기념품 숍에 갔는데 내가 첫눈에 반한 하우즈 워터링 캔이 딱 놓여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만나다니 이건, 운명이야!라고 속으로 외치며 데리고 와 침대 곁에 둔다. 운명이니까, 필요인지 욕망인지 구분할 필요도 없다. 그리곤 식물에게 물을 줄 때마다 런던 여행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상상이지만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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