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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지경 Jan 23. 2024

낯선 사람이란 없다.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있을 뿐

수영 친구가 생기는 기분

중급반이 되자 레인이 달라졌다. 초급반을 기준으로 1번 레인에서 5번 레인으로 옮겼을 뿐인데 어쩐지 수영장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들도 낯설었다. 초면인 사람도 오다가다 샤워실에서 본 사람도 이름과 나이를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 수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불안하면서도 설렜다.


수영 강습을 받을 땐 원활한 흐름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앞사람에 바짝 따라붙지 않으면서 뒷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는 속도로 치고 나아가야 하는데, 앞사람과 간격이 벌어지면 못 따라잡을까 봐 막막했고 뒷사람이 바짝 다가오면 발을 잡힐까 봐 불편했다. 뒷사람이 발을 치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안 맞는 팔과 다리의 박자가 꼬여 허우적 댔다.


그래서 결심했다. 토요일 자유수영을 시간에 더 열심히 연습을 해야겠다고. 구립 수영장의 경우 수영 강습이 매일반, 월수금반, 화목토반이 있는데 매일반이나 화목토반을 다닐 경우 토요일은 자유수영의 날이다. 회원들이 매일 수영할 권리가 있다면, 수영 강사들은 주 5일 근무할 권리가 있으므로.


중급반도 아침 7시 자유수영(일명 자수)은 여유로웠다. 내가 연습하고 싶은 영법을 나만의 속도로 물속을 유영하는 기분이 상쾌했다. 샤워실도 평일보다 훨씬 한적해 느긋하게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전쟁 같은 평일의 샤워실에 대해서는 조만간 한 편 쓰겠습니다.)


상쾌하게 수영하고 느긋하게 샤워한 어느 토요일, 머리를 말리려는데 중급반 2번 레인 회원 한 명이 옆으로 쓱 다가왔다. 내가 레인을 잡으려다 실수로 그녀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갰을 때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한 사람이었다. 토너가 없나? 수분크림이 없나? 뭐든 빌려주겠다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내게 그녀는 뜻밖의 말을 건넸다.

   

"우리 또래 아니에요?"

"우리? 아, 나이요? 내가 (훨씬) 더 많을 거예요."

"에이, 나 81년생이에요."

"나는 78년생이에요."

"아, 언니구나."

"..."

"시간 되면 커피 한 잔 할래요?"

나이 조사에서 커피로 훌쩍 건너뛰는 81년생 아무개 씨의 빠른 전개가 놀라웠다. E(MBTI)가 분명했다. 조찬 모임이 있는 CEO도 아니고 토요일 아침 8시 반에 시간이 안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집에 가서 마실 커피인데 같이 마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수영장에서 스타벅스까지 걸어가는 사이 81년생 아무개 씨는 빈속에 맥주 한 잔 걸친 것 같은 하이텐션으로 나를 언니라 부르며 재잘댔다. 그냥 E가 아니라 극 E가 분명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또 다른 81년생 아무개 씨가 자기 쿠폰으로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그렇게 이름 모를 언니와 이름 모를 동생들이 둘러앉아 통성명을 했다.


"호영 아니고 효영?"

"계화? 개화 아니죠?"

셋 다 받아쓰기하면 틀리기 딱 좋은 이름이었다.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물어본 후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는 우지경이에요. 오 아니고, 우유 할 때 우!."

호영이 아니고 효영과 개화 아니고 계화와 우유 할 때 우지경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수영 이야기로 흘러갔다.  

 

"나는 수영이 너무 재밌어요."

"나도!"

"이제 막 중급반에 와서 정신은 없지만, 재미있어요. 수영 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오래됐는데..."

"나도 오래됐어요. 코로나에 쉬어서 몇 년 인지 가물가물해요."

"나는 코로나에 시작했어요."

"수영장 문 다시 열었을 때요?"

"응, 그때는 수영 선생님이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했다니까요."

"나는 코로나 때...."

여행지에서 또 다른 여행자를 만나 여행 정보를 교환할 때처럼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았다. 어서 중급반 타짜가 되고 싶은 초짜답게 내가 두 사람에게 궁금했던 것은 수력이었지만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대신 둘 다 얼마나 수영에 진심인지 느낄 수 있었다. 한 친구는 수영과 사람을 좋아하는 티가 팍팍 났고, 또 한 친구는 수영이면 수영 요가면 요가 골프면 골프 어떤 운동을 해도 꾸준히 잘 해낼 것 같았다.  


뜻밖의 유쾌한 대화를 나누며 생각했다. 수영이 좋아서 수영장에 모인 사람들의 결은 비슷하구나. 다음에도 토요 자수 후 커피를 마시자며 스타벅스를 나서는데, 들어갈 때만 해도 낯선 사람들이 동네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언니, 오늘 왜 수영 안 왔어? 커피 마시러 와요."

일어나자마자 '망했다.'라고 생각한 어느 가을 아침이었다. 새벽 수영을 시작한 후 아무리 늦게 자도 6시 반에는 눈이 번쩍 떠진다고 믿었는데, 눈 떠 보니 7시 17분이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수영장에도 안 가고 씻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있다니. 자책할 시간에 커피나 마시자 하고 나간 카페에는 효영과 얼굴만 아는 중급반 2번 레인 회원이 앉아 있었다. 날렵한 스피도 수경을 쓰고 수영하는 모습이 노련한 선수 같아 거리감이 느껴졌었는데, 이름을 소개하는 모습이 꼭 나 같아서 반가웠다.

 

"최 아니고 채! 채소 할 때 채아빈이예요."

"아, 채송화 할 때 채요? 이름 예쁘다. 나는 우유 할 때 우지경."

"근데 왜 수영을 안 왔어요?"

"수영장에 뛰어가도 7시 반이 넘을 것 같아서..."

죄지은 사람 마냥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내게 채소 할 때 채아빈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할 샤워 30분에 와서 20분이라도 수영하고 씻고 가요."

꽁꽁 언 내 편견을 깨는 도끼 같은 한 마디였다. 그날의 커피는 진하고 따뜻했고, 그날의 수다는 소금빵처럼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했다. 얼굴만 아는 사이에서 수영 후 커피 마시는 사이로 관계의 온도가 달라지는 시간이었다.  그때 예감했다. 앞으로는 이 친구들 보고 싶어서 수영장에 열심히 가겠구나. 수영 후 30분의 커피 수다만으로도 하루를 잘 보낼 에너지를 얻겠구나. 책을 출간할 때까지 세상과 등지고 살겠다던 내가 그리워한 것은 관계의 온도였다는 것도.


내 예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우리는 커피 마시며 수영하는 친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술 마시며 수영 이야기하는 친구가 되었다. 같이 술 마신 다음날, 같이 해장 수영(?)을 하고 모닝커피도 마셨다. 가장 수력이 긴 계화가 말하길, 아무래도 수영이 해장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아무렴 그렇고말고.


영하 14도인 오늘도 같이 수영을 하고 8시에 문을 여는 동네 카페 창가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평영 팔에 자유형 발차기를 할 때 앞으로 더 잘 나가는지, 평영 팔에 접영 발차기를 할 때 앞으로 더 잘 나가는지, 며칠 전 샤워실에서 자리 맡기 대첩의 전말은 무엇인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낯선 사람이란 없다.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있을 뿐이다.

요즘은 이 친구들과 내일 보자고, 손을 흔들며 헤어질 마다 아일랜드 속담을 떠올린다.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아일랜드 출장 전 찾아본 속담이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중급반에 오길 잘했다고.(지난여름, 인생의 목표가 책 마감과 수영인 사람처럼 두 달을 살고 나니, 중급반에 오게 되었다.) 중급반에 와서 제일 잘한 일은 효영이가 커피 한잔 하자고 했을 때, 같이 마신 것이다. 그 덕에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수영 친구가 생겼고, 일상이 더 즐거워졌다. 


앞으로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무얼 시도하든, 낯선 사람 =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라고 여기면 세상이 더 살만하게 느껴질 것 같다. 



덧,

혹시, 인생의 목표가 책 마감과 수영 밖에 없던 사람처럼 살던 제가 쓴 책이 궁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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