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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지경 Jan 18. 2024

중급반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중급반 병에 걸린 수린이의 고군분투기  

“수영을 오래 했는데 왜 아직 초급반이야?”

친구가 물었다. 수영 강습을 받기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1년 전에 배우기 시작하긴 했는데 세 달 배우고 두 달 쉬고 또다시 다니다 보니 강습은 7개월 들었나? 띄엄띄엄 배워서 그런가 수영이 안 늘어. 지금도 여행하느라 수영을 못하고 있잖아.”

답이 너무 길었다. 한 마디로 아직 중급반 갈 실력이 안 된다는 얘기였다.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고 했는데 구구절절 핑계만 댄 기분. 빙하기에 살아남은 공룡의 심정으로 코시국을 보내는 동안 본업(여행작가)도 정체되어 있었는데, 모처럼 재미를 붙인 취미인 수영도 정체된 것 같아 시무룩해졌다.


40대라 그래. 30대였다면 달랐을 거야. 속으로 나이 탓을 하다 문득 저녁 9시 수영장 풍경이 떠올라 머쓱했더. 비슷한 시기에 초급반이었던 40대 회원들도 대부분 중급반 1번 레인에 있었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은 레벨이 초급, 중급, 상급반으로 각각 레인을 2개씩 쓴다.) 그분들은 중급반에서 양팔 접영을 하는데, 나는 아직 한 팔 접영도 어설펐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라면 시간이라는 도구가 필요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매달려 원고를 쓰듯 한 팔 한 팔에 집중하는 수영 연습 시간.


그때 다짐했다. 서울에 돌아가면 열수 하여 중급반에 가리라. 중급반에 가라면, 우선 수강신청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 했다. 해외에서 하려니 시차라는 벽도 있었다. 그깟 산과 벽 따위 의지로 뛰어넘자. 호기롭게 아이폰 알람을 켜켜이 맞추었다. 의지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잠이 의지를 이겼다. 쿨쿨 자고 일어나니 모든 수영 강습이 마감되어 있었다. 아, 이제 어쩌지? 자책할 시간에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다행히 내게는 “혹시나 정신'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수영장에 전화를 걸어 지금이라도 수강신청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등록할 수는 있는데, 자리가 있어야 하시죠. 누가 취소해야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역시나 수강신청은 넘기 힘든 산이었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영장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다가 한 자리를 발견했다. 새벽 7시 월, 수, 금반. 40년 넘게 저녁형 인간 외길 인생을 걸어온 나였건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얼른 수강신청을 하는 수밖에.


새벽 7시 초급반의 풍경은 어쩐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특공대 교관처럼 웃음기 없는 표정의 초급반 선생님은 출발이라는 말 대신 물을 세게 팍 쳤고 회원들은 그 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출발했다. 선생님은 유아풀과 초급반 레인을 오가며 수업을 하면서도 매의 눈으로 사람들의 동작을 분석해 한 명 한 명 피드백을 주었다. 내게는 자유형 스트로크 할 때 엄지 손가락부터 들어가서 새끼손가락부터 나와야 한다고 했다. 물을 잡아서 밀 때는 팔은 허벅지까지만, 리커버리 후에는 견갑골을 써서 팔을 쭉 멀리 뻗으라고도 했다. 난생처음 듣는 아주 세밀한 피드백이었다.


식기세척기의 쾌속 버튼을 누르듯 혹은 세탁기 급속세탁 버튼을 누르듯 신속하게 나의 자세를 고치고 싶었지만, 내 몸에 그런 버튼이 있을 리가 있나. 손가락에 신경을 쓰자 발차기가 느려졌고, 물을 잡을 때 팔을 허벅지까지 하려고 하면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때렸고, 견갑골을 어떻게 움직이지 생각하다 보면 팔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내 몸에 내가 농락당하는 기분이랄까. 자유형뿐 아니라 배영도 평영을 할 때도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접영은 더 심각했다. 양팔 접영이 익숙지 않아 몸이 뜨지 않는 데다 팔을 제대로 뻗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이 어흥하는 호랑이 같기도,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양팔 접영을 제대로 해야 중급반에 갈 텐데, 그러려면 주 3일 수영으로는 부족했다. 매일 수영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새벽수영을. 혈혈단신 맨손으로 전쟁에 나가는 수린이의 심정으로 수영 수강신청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새벽 7시 수영 화목토 반은 빈자리가 없었다. 화목토에 다른 수영장이라도 다녀야 하나. 성동구 홈페이지를 뒤지다 최근에 문을 연 수영장 오전 10시 수영반 빈자리를 발견했다. 결국 6월 화목토요일엔 셔틀버스를 타고 인근 수영장으로 긴급 출동하기로 했다.


아침마다  슈퍼마켓 앞에서 수영가방을 들고 노란색 셔틀버스 타고 수영장에 가는 게 예상보다 번거로운 일이었다. 하필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등원하는 시간이라 노란 셔틀버스가 너무 많이 오갔다. 내가 탈 노란 셔틀버스를 재빨리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야 태워줬다. 아이들과 아이들 손을 붙잡은 엄마와 할머니들 옆에 서서 노란 셔틀버스를 타겠다고 오리발 가방을 흔드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대치동 초등학생들이 좋은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또 다른 학원에 다닌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네. 중급반이 뭐라고. 그래도 한 달이 지나니 양팔 접영으로 25m 수영장 끝까지 갈 수는 있게는 되었다.


"선생님, 저 이번 달엔 매일반이어요.”

7월 첫날 강사님에게 매일 수영 강습을 듣는다고 어필(?)했다. 극성수기라는 여름 치열한 수강신청 경쟁에 이긴 승자의 미소를 띠며. 선생님은 나의 평영 물 잡기가 나아지고 있다고 했고, 나는 자세를 제대로 하려고 노오력 하고 있다고 또 한 번 어필했다. 중급반에 가고 싶은 초급반의 마음을....


7월 한 달간 꼬박꼬박 출석하며 수영 강습을 들었다. 선생님은 매일 영법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꼬박꼬박 설명해 주었다. 접영 발차기는 입수킥과 출수킥으로 나뉘는데 나는 입수킥을 할 때 너무 발로 물을 세게 차고, 출수킥을 할 때는 무릎을 너무 접는다고 했다. 같은 말을 들어도 나아지지 않자, 선생님은 무렵 몸소 내가 한 동작을 재연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이런 출수 킥은 없어요." 민망해서 고개를 돌려 옆 레인을 보는데, 바로 옆 상급반 회원들이 날치처럼 날아오르며 접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7월 말에는 초급반 선생님에게 "이제 좀 어흥 접영에서 벗어난 것 같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8월이 되자 수영장 초급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마침내 초급반 1번이 된 나는 뒷사람들에게 이렇게 나불댔다. “이번 달 초급반 17명이에요. 이 정도 되면 중급반으로 좀 보내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은 누구에게도 중급반에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회원님까지!”

8월 3일 7시 5분쯤 초급반 레인으로 돌진하려는데, 초급반 선생님이 초급 회원 4명을 중급반 레인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뒷걸음질 쳐서 나도 중급반에 보내달라고 할까? 다리는 초급반인 5번 레인을 향하고, 고개는 중급반인 1번 레인을 향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초급반 선생님이 ‘회원님까지’라는 말로 나를 중급반 선생님에게 인수인계 했다. 수영을 배우려는 초보가 몰리는 여름 극성수기에 밀어내기로 파도 타듯 중급반에 오게 되다니.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중급반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중급반에 가니 어때?"

“축하해. 중급반 가고 싶어 했잖아”

그날 샤워실에서 만난 초급반 사람들이 내게 한 마디씩 했다. 어떤 질문에도 내 대답은 같았다.  

"힘들어요."


며칠 뒤 수업이 끝나고 수영장 25m 레일 끝에 다슬기처럼 매달려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던 초급반 선생님이 손을 흔들며 내게 물었다.

"어때요. 할 만해요?"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다시, 돌아갈 수는 없겠죠?)"


중급반 타령을 하던 내가 중급반에 오니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수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취직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던 취준생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니 힘들어서 퇴사하고 싶다는 격이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이 내 직장도 아닌데 못한다고 스트레스를 받고 그래. 오래 즐기고 싶은 취미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아? 뒤에서 따라 하다 보면 실력도 늘겠지. 게다가 중급반에 적응하려고 매일 출석하다 보니 아침형 인간이 되고 있잖아.  


글을 쓸 때 한 번에 한 자씩밖에 쓸 수 없듯, 수영도 한 팔 한 팔 나아가는 것이니까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어차피 수영은 할머니가 될 때까지 할 거니까 조바심 내지 말고 동작을 하나씩 제대로 해보자. 그러다 보면 이번 생에 상급반에 갈지도 모를 일이다. 상급반에 가면 수영 대회에도 출전하고! 꿈도 야무지지.


야무진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중급반 수영인 생활을 흠뻑 즐기련다. 나날이 늘어나는 수영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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