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린이가 오리발을 만났을 때
"한번 신어 볼래요?"
"그래도 돼요?"
오리발을 처음 신어본 날의 감각을 또렷이 기억한다. 저녁 9시 초급반에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초급반의 고인물(?) 선배가 내미는 오리발을 신고 배영을 했더니 순식간에 25m 풀장 끝에 도착해 버렸다. 오리발로 빨라진 속도를 가늠하지 못해 하마터면 머리까지 박을 뻔했다.
이게 뭐지? 낡은 자전거를 타다가 새 오토바이를 탄 느낌.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 기분이 이럴까. 오리발은 신세계였다. 신이시여, 저에게 초능력을 주시려거든 물갈퀴를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싶을 만큼. 자유형 배영 밖에 할 줄 모르는 수린이었지만, 오리발만 있으면 50m 수영장도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오리발을 빌려준 분이 한번 오리발을 신으면 벗기 싫다고 하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희소식도 들었다. 일주일에 2번 오리발 데이가 있으며 그날에는 오리발을 신고 수영을 할 수 있다고. 그날부터 당근마켓에서 오리발만 검색했다. 오리발은 신고 싶은데, 이 힘든 수영을 얼마나 더 다닐지 확인이 서지 않아서 중고 오리발을 살 심산이었다. 그때만 해도 맨발로는 숨이 차서 자유형으로 25m를 끝까지 못 가서 중간에 서곤 했다.
오리발데이는 점점 다가오는데, 당근마켓에는 내 발 사이즈에 맞는 오리발이 올라오지 않았다. 결국 다급하게 동대문운동장 아레나 매장에 가서 핫핑크색 롱핀을 샀다.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 사이즈에 맞는 오리발은 그것뿐이었다. 찬 오리발 뜨거운 오리발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날이 오리발데이였다. 어서 오리발을 신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때는 실내용 오리발에는 롱핑과 숏핀이 있으며 롱핀은 속도를 내기 좋고 숏핀은 몸의 감각을 느끼며 훈련하기 좋다는 것도 몰랐다. 오리발을 신으면 발등으로 물을 누르며 천천히 움직여야 부드럽게 나아간다는 것도. 그저 롱핀을 신고 슝슝 나가는 속도에 반해 오리발데이를 좋아하게 됐다.
접영까지 배우고 나니 오리발은 더욱 유용하게 느껴졌다. 접영의 경우 오리발을 신고 할 때와 오리발 없이 할 때 간극이 너무 컸으므로. 오리발데이에는 맨 발로 수영을 하는 게 내 실력인데, 오리발을 신고 수영을 하는 게 내 실력인 듯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오리발 데이 다음날엔 그 착각에서 깨어나 헉헉 거렸지만.
수영을 3달쯤 배우다 하와이 출장 겸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도 오리발을 챙겨갔다. 실내 수영 강습용 오리발이지만 스노클링을 할 때 내 오리발을 신고 싶어서였다. 마우이 섬 몬타지 카팔루아 베이라는 리조트에 묵었는데, 나의 오리발만 믿고 리조트 앞 카팔루아 베이의 푸른 바다로 풍덩 뛰어들기도 했다. 잔잔한 파도를 따라 헤엄치다 보니 깊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닷속엔 거북이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하와이의 철저한 거북이 보호법에 따라 위로 물러섰는데 거북이가 다가왔다. 거북이는 내 옆을 지나쳐 유유히 수면 위로 올라가 호흡했다. 난생처음 보는 신비스러운 광경이 이끌려 거북이를 따라 헤엄쳤다. 그 후로 나의 아레나 롱핀은 나와 함께 세부와 칸쿤까지 여행했다.
새벽수영을 시작한 지 3달 만에 중급반으로 옮긴 후 오리발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롱핀을 신으면 빠르긴 하지만 운동이 안 되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숏핀을 샀다. 숏핀을 신고 접영을 하니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달랐다. 그렇게 몇 달 지나자 숏핀에 적응이 되어 롱핀보다 숏핀이 편해졌다.
발리 여행에는 숏핀을 가지고 가서 스노클링을 했다. 숏핀으로 킥을 차며 만타 가오리를 따라가는 기분이 짜릿했다. 가이드가 수영을 잘하니 구명조끼 벗고 거북이를 보고 와도 된다고 허락해 준 덕에 바다에서 숏핀을 퍼덕거리며 거북이를 향해 질주도 했다. 질주라고는 해도 수면 가까이에서 옆으로 헤엄치는 정도였지만.
수영을 배운 덕에 오리발과 친해졌고, 오리발과 친해지니 바다에서 스노클링이 즐거워졌다. 스노클링이 좋아지니 나의 여행도 풍성해졌다. 수영장에서 바다로 취미의 확장이랄까. 오리발이 익숙해진 덕에 최근에는 프리다이빙 AIDA1 자격증도 땄다.
프리다이빙 강습을 받으며 알게 된 사실인데, 프리다이빙계의 숏핀이 수영계에서는 롱핀이다. 수영계의 숏핀을 프리다이버들은 닭발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나는 닭발을 차고 발리의 바다를 그토록 열심히 헤엄친 것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여전히 숨이 차고, 얼굴에 열이 나며, 심박수가 올라가는 수영을 매일 할 수 있는 것은 오리발의 은공이 크다. 주 5일 강습 중 2일의 오리발데이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격렬한 응원 같은 존재다. 다음 주에도 나는 오리발과 함께 고관절을 접고, 배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띄우기 위해 기꺼이 노력할 것이다. 하루는 롱핀으로 하루는 숏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