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를 위한 여행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

by 피터C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요즘 와서 실감하고 있다.

9년 전, 그토록 바라던 아기가 태어났다. 결혼 3년만에 얻은 딸이었다.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작고 연약했던 아기는 뒤집고, 기고, 걷고, 어느새 자기키보다 더 높은 곳에서도 두려움 없이 뛰어내리는 용감하고 튼튼한 꼬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계속해서 성장했다.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얼마 전 나는 소파에 웅크린 채로 잠든 아이를 침대로 옮기다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허리가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더는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 들어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숙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는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아이와 나의 굳센 동맹이 유효기간 만료를 눈앞에 뒀음을 의미했다. 이제 곧 “같이 놀아요”하고 조르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 테고, 아이돌에 열광하며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날은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는 자연스럽게 진학과 진로를 고민하는 나이가 될 것이다.

정말이지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우리에게는 5년 넘게 여행을 하며 ‘추억의 섬’에 차곡차곡 쌓아둔 소중한 ‘핵심기억’들이 있었다. 그것은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과 분노 등 여러 감정들이 한 데 어우러진,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순간순간 우리를 성장시켜온 기억들이었다.

사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가족의 여행은 보통의 가족들과 다를 바 하나 없었다. 나는 여행칼럼을 써서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사람이다. 여행이 직업인 셈이다. 밥벌이라는 현실 안에서의 여행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일단 떠나면 반드시 지면에 담길 이야기와 사진을 건져 와야 한다. 그래서 밥벌이와는 무관한 가족여행을 떠날 때면 되도록 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아는 정보 한에서 멋진 풍경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편안히 쉬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가족여행이라고 여겼다. 아내가 그런 여행에 만족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아이가 바라는 여행은 아니었다. 아이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이따금 아이가 이러저러한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상품화된 체험은 전형적인 데다가 참여시간도 짧고 수박겉핥기 식인 게 대부분이어서 아이는 그 또한 썩 즐거워하지 않았다. 슬프게도 여행은 아이에게 ‘핵심기억’을 심어주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풍경, 맛, 뭔지도 모르고 하는 체험 따위의 것들은 아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여행,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평소 아이가 던지는 질문에서 힌트를 얻었다. “바람을 볼 순 없나요?”, “소리는 왜 잡지 못 해요?”, “이 냄새는 왜 슬퍼요?”, “구름 위로 걸어 다닐 수는 없어요?”, “별은 왜 떨어지지 않나요?”, “빗방울은 정말로 무지개가 흘린 눈물이에요?”, “밤은 왜 무서워요?”, “죽음이 뭐예요?”

어떤 질문은 너무 엉뚱해서 말문이 막혔고, 어떤 질문은 책을 들여다보면 간단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던진 질문들이 적어도 쓸 데 없지 않으며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본다는 것, 듣고 말한다는 것, 냄새 맡는다는 것, 피부로 느낀다는 것, 상상을 이룬다는 것, 공감하고 깨닫는다는 것 등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각이며 필수적인 덕목인 여섯 가지 주제 아래 질문을 하나씩 해소해나가는 새롭고 흥미로운 여행들을 통해서 말이다. 이렇게 말하니 아주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나는 여행을 핑계로 아이와 즐겁게 놀 궁리를 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장소’에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경험’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 그곳이 얼마나 깨끗하고 편안하며 아름답고 대단한지가 아니라, 아이가 그곳에서 스스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가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행의 주인공은 당연히 아이였다. 나는 조력자이자 관찰자를 자처했다. 내가 먼저 나서서 주도하거나 개입하는 것을 최대한 피했다. 나는 수없이 많은 질문거리들을 던짐으로써 아이가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끈질기게 기다림으로써 깊이 생각할 기회를, 정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다르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여행에서 돌아오면 행여 한 조각이라도 그 기억을 잊어버릴까봐 신났던 일, 우울하고 슬펐던 일, 화났던 일, 무서웠던 일, 힘들었던 일 등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일들을 최대한 꼼꼼히 기록했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고민했던 내용과 왜 그런 여행을 했는지 그 이유도 빼먹지 않았다. 나는 지금부터 아이와 내가 함께 했던 그 여행들을 세상에 소개하려 한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나’라는 존재를 ‘경험하는 나’와 ‘기억하는 나’로 분류한다. 그에 따르면 삶에는 6억 개 정도의 ‘순간’이 존재한다. 한 달에 대략 60만 개의 순간이 있고 그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머릿속의 지우개가 말끔히 지워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색다른 경험만큼은 이야기가 다르다. 결코 쉽게 잊히지 않으며 늙어 죽을 때까지 곱씹을 아주 훌륭한 추억, 즉 ‘핵심기억’이 된다. 나는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우리의 이 같은 여행이라면 아이들을 위한 여행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여행이라면 아이들에게 특별한 기억을 심어줄 것이며, 인생의 어느 지점이든 반드시 겪게 될 고난의 시기에 잠시나마 아이를 위로하고 다시금 힘을 낼 용기를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아이들은 결코 기다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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